죄 없는 생애: 가능한가 아닌가?

Posted in 완전 문제와 승리

죄 없는 생애: 가능한가 아닌가?

저자: 롸벌트 제이 윌랜드

       그릇된 질문을 그릇된 시간에 묻는 것은 혼란을 야기시키게 된다. 무죄한 생애를 언급할 때마다 어떤 이는 종국적인 일대 전시적 쑈로 질문을 하게 된다: “너는 죄 없이 살고 있니? 너는 완전하니? (그리스도 외에) 완전한 어떤 사람을 나에게 보여 줄 수 있니?” 웃음은 보통 이러한 탄핵적인 질문들 뒤에 오는 긴장된 침묵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들은 이 장의 제목에 적절하지 않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면 결코 완전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또한 주장 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심지어 어린 아이도 확실히 안다. 거만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뉘우치는 세리가(가능한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였다(눅18: 10-14참고). 예수께서 재 강림하셔서 당신의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때까지 그들은 “그(자기들) ··. 속에 〔즉 (그들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롬7: 18).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바울이 주장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빌3: 12, 13)는 바울보다 더 많은 주장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시험에 대한 위험성이 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거나 또는 그러한 생각이 추호라도 있다면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자신에 대하여 불신하고 그리스도를 의존하는데 있다(COL155, 그리스도의 실물교훈 151).

       이와 같이 자신을 〔자만심과 자기를 신뢰함〕 … 버려야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으로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요 천국으로 걸어가는 매 발걸음마다 거듭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의 품성의 순결함을 더욱 똑똑히 볼수록 우리의 죄가 심히 가중한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생각이 더욱 없어질 것이다(그리스도의 실물교훈 157).

       십자가에서 면류관에 이르기까지 열렬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다. 거기에는 타고난 죄와(inbred sin) 더불어 씨름 하는 것이 있고, 외적인 그릇함과 대항하는 싸움이 있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7, 11, 29).

       우리는 올바른 질문을 올바른 때에 묻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바른 때는 곧 우리 크신 대제사장이 당신의 최후의 속죄 사업을 완결시키고 계시는 동안, 하늘 성소를 정결케 하시는 이 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시작된 이래 인간 역사 중에 유일무이한 어떤 일을 성취 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아무도 모든 죄를 정복 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인 반면에, 우리는(그리스도 외에) 현재나 과거의 아무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것 처럼 그가 승리 하였다고 판단(심판)할 수 없는 것이 동일하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늘 지성소 봉사가 그러한(승리하는) 결과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과거나 현재에 우리가 승리하지 못한 것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우리가 구세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를 이기기가 불가능 하다 고 말하는 것은 사실 죄를 정당화하고 죄를 격려하는 것이며 대 원수의 편에 서는 것이다.

       물어볼 바른 질문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과 또한 대제사장으로써의 그분의 봉사가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부터(죄안으로가 아니고) 구원할 충분한 능력이 있을까? 그분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들을 끝까지(완전히) 참으로 구원하실 수 있는가?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 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수 있도록 “은을 연단하여 깨끗게 하는자”로써(말3: 3) 그분이 참으로 성공 하실까? 그리스께서 재 강림하실 때에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여기에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분께서 발견하실까?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그분은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일을 세상에 창조하”(렘31: 22)실 수 있는데 그분이 성취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 강림을 위하여 한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인간 역사 가운데 먼저는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 12,)고 하는 거룩하신 선포가 이루어지고 다음 사건은 주님의 오심이다(14절).

       이 성도들이 사실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계명을 지킨다고 가정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세 천사의 기별의 문맥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늘은 이 사람들이 “정절 있는 자(처녀)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4, 5절 흠정역)고 선언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본래 (날때부터) 죄가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롬3: 23). 그러나 이 선언으로 하여금 어떤 의미가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의 믿음(예수를 믿는 믿음-역자주)이 역사(行, 일)하여 왔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겼다(계3: 21).

이 승리한 백성의 예언적인 일별(一瞥, glimpse)을 재림 후 미래에 삽입 시키려 애쓰는 것은 사건의 전후 관계를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다. 이 같은 무리가 인류의 은혜의 기간이 마치기 이전에 승리를 얻은 것이 계15: 2을 보아 분명하다.      

       이전 세대는 한번도 완전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인 완전의 진리를 분명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의역: 이전 세대는 그리스도인 완전의 진리를 분명히 이해 한다하고 완전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하늘 성소 정결의 시간이 아직 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이 왔을 때에 즉,“그 나팔이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마치리라)”(계10: 7).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가 대 종교 개혁과 복음 사명의 성취를 완료하게 되는 특별한 공헌이 여기에 있다. 하늘 성소 정결의 진리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같이 연결시키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주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보내신 그대로, 1888년 기별의 참된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1888년 기별은 광신과 완전론의 오류에서 벗어난 하나의 영광스러운 소망이다. 1888년대 시작부터 그 두 기별자들은 죄없는 생애가 가능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과 같이 이길 수 있다는 것과, 또한 이 영광스러운 가능성의 열쇠는 지성소에서 하시는 대제사장의 봉사를 그 백성이 믿는 믿음여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으며 또한 강조하였다.

       와그너의 저서 그리스도와 그의 의 5페이지 처음 세 문장은 죄없는 생애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균형지게 요약한다. 그 문장들은 튼튼한 참나무로 자라난 하나의 진리의 상수리 이다.

히브리서 3장 첫 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모든 명령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권면을 받고 있다. 그것은 이것이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성경이 명하는 대로 그렇게 하는것, 즉 그분의 계신 그대로 그리스도를 총명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킬 것이니, 이는 “바라봄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하심에 대한 루터의 개념위에 안전하게 건설된 죤스와 와그너는 다 같이 세천사의 기별의 독특성에 대한 세가지 필수요소를 발견 하였다. 1888년 기별이 16세기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갈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1. 신자는 1844년에 시작한 원형의 속죄일에 성소 정결의 일을 하시는,“우리의 믿는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2. 계속하여 총명하게 그리스도를 그가 계신(그인격) 그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대리인과 모본으로써의 그분의 역할이 그분으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시도록 요구하였으므로, 이리하여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게 된, 신약의 참된 가르침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3. 그러한 구주와 대 제사장을 믿음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다. 변화시킨다는 말에 주목하라. 다만 참된 신자가 그렇다고 간주되거나 법적으로 그렇다고 여김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죤스의 가르침이 어떻게 와그너의 가르침과 완전히 조화되었는지 보자. 처음으로 1898년과 1899년에 리뷰 앤드 헤랄드지 기사로 출판된 그리스도인 완전을 향하여 바쳐진 길(The Consecrated Way to 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기사로 그는 그것을 단순하고 능력 있게 말한다.

       육체로 오심으로-모든 것이 우리와 같이 되시어 모든 점에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므로-그분은 당신 자신을, 영혼이 있는 바로 그 입장에서, 모든 인간 영혼과 동일시 하셨다. 모든 영혼이 있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그분은 그 영혼을 위하여 파란 많은 전 생애와 일생의 모든 경험을 통하여 심지어 죽음과 무덤을 통하여서 까지라도 이김을 위하여 지성소 안으로, 곧 하나님의 우편으로 가는 하나의 새롭고 산 길로(자신을) 바치셨다. … 그리고 그분의 이 “길”을 우리를 위하여 바치셨다. 그분은 우리 중에 하나가 되심으로 이 길을 우리의 길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그 길은 우리에게 속한다. 그분은 이 바쳐진 길로 걸어갈 거룩한 권리를 각 영혼에게 주셨다. 그리고 그분이 육신-우리의 육신-으로 친히 그 길을 이루심으로, 그 길이 있는 모든 점에서, 모든 사람(영혼)이 그 길로 걸어갈 수 있게 하셨다. 그렇다. 그분은 실제적인 보증을 주셨는데 그 보증에 의하여 지성소 안으로 아주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

       그분이 한 길을 만드셔서 바치셨는데, 그 길을 따라 그분 안에서 각 신자마다 이 세상에서 평생 동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있는 생애를 살아, 결과적으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와 일치하는 생애를 살 수 있게 하셨다(83, 84페이지). 

       즉시로 이것이 완전론의 이단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난다. 죤스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완전, 성품의 완전은, 그리스도인 목표인즉, 이 세상에서 인간의 육신으로(안에서) 도달되는 완전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인간 육신으로 완전을 달성하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여 한 길을 만드셔서 바치셨으며, 그분 안에서 그 길을 따라 모든 신자마다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분이 완전에 도달하셨으므로 우리의 크신 대 제사장이 되셨으며 참 성소에서 그분의 대제사장 직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완전에 도달할 수 있게 하셨다(상동 84).

       우리는 인간 육신으로(안에서, (in) 도달되는…… 성품의 완전과 인간 육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완전론과 사이에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완전론은 다음 거짓된 개념들 중에 하나나 혹은 그 이상으로 말미암아 특징 지어진 하나의 이설이다.

1.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을 영화롭게 되기 이전의 아무 때에나 사람의 죄있는 본성(죗된 본성,    sinful nature)이 삭제됨.

2. 사람이 여전히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동안 정신적이나 신체적 능력의 완전한 회복

3. 육신의 완전

4.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산다는 것.

5. 타고난 거룩함이나 의에 의지 하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공로를 주입함.

6. 어떤 우월한 거룩함을 통하여 구원 받았다고 주장함.

7. 말씀을 대신하는 감정이나 인상을 가졌다고 주장하거나 그것들을 신뢰함.

8. 죄를 짓거나 타락할 수 없다고 믿음.

9.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 범하는 생애를 살면서 순전히 사법적인 의롭다하심 때문에 안전하다고 가정함.

10. 만일 사람이 구원을 받거나 성화되면, 계속되는 죄가 죄 되기를 그친다고 하는 가정

       이러한 거짓된 개념들 중에 아무것도 1888년 기별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 강림을 위하여 준비하라는 분명한 호소를 발견한다. 엘렌 화잇은 그 호소를 인정하였다. 와그너와 죤스의 기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 여인은 말하였다.

       [와그너와죤스의]이 기별은 온 세상의 죄인을 위한 희생 제물이신 높Ol 들리신 구세주를 세상 앞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증인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제시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받도록 백성을 초대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큰 소리로 포고되어야 할 셋째 천사의 기별이며, 대량으로 성령 부으심이 수반되는 기별이다(목사에게 보내는 권면[영문] 91,92).

       자주 엘렌 화잇은 죄에 대한 은밀한 사랑이 그 기별을 거절하는 참된 이유 이었다고 선언하였다. 와그너는 우리에게 자기의 이해를 위하여 루터와 외슬리에게 빚을 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외슬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으로 죄 없는 삶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외슬리가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무서운 반대는 죤스와 와그너가 직면하였던 반대를 예시하였다. 외슬리는 그 당시 투쟁에 대하여 말하였다.

       성경의 아무 표현도 이보다 더 실족케하는 표현은 드물다. “완전하다(perfect)”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완전이라는 바로 그 소리는 그들에게 미운 물건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완전(그 문구 그대로)을

설교하는 자마다 즉, 완전은 이 생에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마다 그들에 의하여 이방인이나 세리보다도 더 나쁜 사람으로 여김을 받는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외슬리 저서, Works of Wesley 제6권 1페이지).

       “아니오” 저 위대한 사람(진센돌프)은 말한다: “이것은 오류 중에 오류이다. 나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미워한다. 나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불과 칼을 가지고 그것을 추적한다” 아니, 왜 그렇게 열정적인가? … 죄에서 나오는 구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은 예외는 있지만 왜 그렇게 열심인가? 성이 나서 날뛰는(사나운)가? 라고 나는 거의 말할 지경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대가 왜 그렇게 죄를 좋아하는가? 죄가 그대에게 일찍이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죄가 그대에게 이생과 내생에서 무엇을 해줄 것 같은가? 그러면 그대가 죄에서 구원 받는 그 소망을 가지는 자들에 대하여 왜 그렇게도 폭력적인가? (상동424).

       외슬리 당시에는 아마도 그 궁극적인 전망 문제를 이해할 수 없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자들은 용이 “여자에게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참으로 지키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그 사실이 사단을 그렇게 분개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율법은 항상 사단의 싸움의 촛점이 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가 항상 타락한 인간에게 “우리가 그 계율을 순종하기란 불가능하다”(DA 24, 시대의 소망 제1권 20페이지 참고)고 말하여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완전을 달성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이상한 능력과 더불어 싸우지”않으면 안된다(SDABC Vol-6, 1098)고 엘렌 화잇이 선언하는 그것과 일치하게 외슬리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슬리 당시처럼 오늘날도 많은 목사들이 사단의 거짓말들을 반향 한다고 그 여인은 말한다.

       사단은 아담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선언 하였으며 이와 같이 하여 지혜와 사랑이 부족하다고 하나님께 죄를 씌웠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면 율법을 주신 자에게 잘못이 있었다고 한다.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참소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 위에 인성을 쓰시고 그가 대표한자들을 위하여 율법 전체를 행할 채무자가 되었다. 그가 일점 일획이라도 실패하였다면, 그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되었을 것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죄 있는 무익한 제물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율법의 모든 제목을 모두 성취하셨으며, 육신으로 (혹은,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였다(condemned sin in the flesh).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말들을 반복하며, 백성들을 진리에서 떠나 돌아서게 하는데 그들의 모본을 따라간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 완전히 순종을 나타내심으로 육신으로 죄를 정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범치 않으셨으며 그 입에 괴사도 없으셨다. 그분은 인성을 더럽히지 않으셨으며, 비록 육신으로 계셨을지라도 아무 점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으셨다. 더욱이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당신이 몰아낼 수 있는, 타락한 인간으로부터의 모든 핑계를 제거하셨다. ·--

       그리스도에 관한 이 증언은 그분이 육신으로 죄를 정죄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무도 자기는 희망이 없이 죄와 사단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입혀주신 의를 통하여 믿는 영혼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할 것이라고 증거하신다(영문시조 1896, 1, 16).

 

       이 솔직한 진술의 날짜는 엘렌 화잇이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을 굳게 지지하고 있었음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별이 최소한의 정도라도 완전론으로 오염되었더라면 그 여인은 확실히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가 단순히 사법적 선언 이상의 것을 성취한다는 것을 주의하라. 그것은 실제로 순종하는 신자를 만든다.

       성품의 완전, 이 영광스러운 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엘렌 화잇이 10년 이상이나 뒤늦게(1907) 말한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분명하여 진다.

 

       [그리스도]께서 아주 완전한 제물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혜를 통하여 각 사람마다 완전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분의 은혜를 받고 그분의 모본을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는,“점이나 흠이 없는-그분 안에 완전”이라고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말과 행위에 있어서 순결하고 참되어야 할 것이다. 이세상-죄악과 타락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속성들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들이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은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순결하게 되고, 당신의 모양을 지닌 “점이나 주름 잡힌 것이나 또한 그러한 것이 없는” 그들을, 아버지께 제시하기를 원하신다.

       그의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넘겨 주셨다. … 우리도 그분께 우리 자신을 넘겨 드려야 한다. 이 양도가 전적일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시작하신 그 일을 마치실 수 있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회복을 가져다 주실 수 있다(리뷰 앤드 헤랄드 1907, 5, 30).

       확실히 성품의 완전은 단지 법률적인 선언이라는 어떤 것이 아니다. 완전은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아직 당신의 백성 가운데 실감나게 납득되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시간적인 요소, 즉 하나의 조건이 포함된다. “[우리의]양도가 전적일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시작하신 그 일을 마치실 수 있다.”그러나 이 “전적인 양도”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함을 포함하는 “완전한 회복”에의 앞서 와야 한다.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자기 본분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우리가 복음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렇게도 치명적으로 필요 되는 그 전적인 양도를 어떻게 할지 알지 못한다. 1888년 기별은 늦은비를 위한 그 거룩한 준비의 시작이었다.

       사단이 그 기별을 증오하고 그렇게도 꾸준히 그것을 반대하여 오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단의 가장 현명한 반대는 분명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그의 교활한 위조품들이다. 이것들은 공통분모를-하나님의 율법에 대립을-일정 불변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동일시 될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 형태 중에 하나를 취한다.

(1) 하나님의 율법은 폐지되었거나 아니면 변경되었다고 선언함.

(2) 하나님의 율법은 순종할 수 없다고 선언함.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계속되는 불순종을 위한 일종의 외투가 되는 그 어떠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도 그것은 일종의 위조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 계명들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범하며 그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품질을 전파하는 자는 그 어느 기별자라도 기만의 대리자임에 틀림 없다(마5: 19 비교).

       성경이 우리의 죄있는 본성으로 죄없이 사는 가능성을 가르치는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인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냄을 받아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다면 그 대답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리인 이시며 모본이시다.

그분이 그것을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실증하여 보이셨다. 그분은“죄를 범치 아니 하시고 그 입에 괴사도 없으”셨다(벧전 2: 22). 그리고 당신의 백성에 대하여도 “그 입에 괴사가 없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주어질 것이다(계14: 5흠정역 참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여기에 있다”(12절). 그들은 “내가 이긴 … 것과 같이 이길 것이다(계3 : 21)라고 예수께서 말씀 하신다. 이 성경의 가르침 속에 완전론에 대하여는 흔적도 없다. 이는”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 크신 이기는 자를 믿는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일찍이 이길 성도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기는 자는 자기들에게 아무 공로도 생기지 않으나 그러나 그들은 저희 믿음으로 모든 것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 (중보) 하심이라. 이러한 대 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우리가 되셨으니 become us),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히7: 25. 26).

       만일 우리가 지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봉사를 제하여 버린다면 재림을 위하여 준비한다는 이러한 개념은 사라지며, 재림운동의 효과는 일반 개신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복하는 “나도-또한”으로 환원된다. 우리의 독특한 기별은 그리스도의 성소 봉사에 집중한다.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하시는 일이 그치게 될 때에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앞에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저들의 옷은 더러움이 없어야 하고 저들의 성품은 피를 뿌려 죄에서 깨끗해져야

한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악과의 투쟁에 있어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 조사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회개한 신자들의 죄가 성소에서 도말되고 있는 동안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정결케 하고 죄를 없이하는 특별한 일이 행하여져야 한다. 이 일이 계시록 14장의 기별에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GC425, 대쟁투 하권 193, 194 참고).

       중보자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목전에 서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구주 이심을 기억하라. 그분은 우리를 하늘에서 배제하실 길을 찾고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하늘에 들어갈 길을 찾고 계신다. 우리가 할 부분은 단순히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생각으로라도 ···시험의 능력에 양보[혹은 양보 할 수 없는]” …… 한 백성을 소유하실 것이다.

       이제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기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자기의 발붙일 곳을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 찾고 있다가 어떤 죄된 욕망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서 유혹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 임금이 올 터이나 내게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요14: 3O 구역). 곧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에게서는 자기가 틈 탈만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계셨으므로 그에게는 사단이 유리하게 이용할 아무 것도 없으셨다. 이런 상태는 또한 환란의 때에 서게 될 신자들에게서도 반드시 나타나 보여야 할 것이다(GC623. 대쟁투 하권 482 참고).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아, 그것이 바로 내가 무서워하였던 것이다. 내가 환란의 때를 통과하여 서기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무덤을 통과하기를 원한다. 내가 잘 견디어 나갈 수 없을까봐 염려된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런 식으로 느낀다면-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참으로 이기적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마지막 날 우리에게서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충성을 그분에게서 빼앗는 것이요, 또한 우리는 어떤 경험과 시련을 피하고 있으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우리 자리에서 그 시련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전 관심이 단순히 하늘 나라를 얻는 것이라면, 우리는 확실히 이기적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하도”가 환란의 때를 통과하여 승천하는 것과 결국은 꼭 같은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기들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을지 모르나 사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피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위의 인용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이것을 분명하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우리에게서 분리 시키는 것은 현세에 있는 일이다. 우리의 고귀하신 구주께서는 우리 자신이 그에게 연합하기를-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강하심에, 우리의 무지함을 당신의 지혜에, 우리의 무가치함을 당신의 공로에 결합시키기를 -우리에게 간청하신다(대쟁투 하권 482 참고, GC 623).

       만일 우리가 즐겨 “우리 자신들을 그분에게 연합시키기를” 원한다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아프리카에서 여러 해의 선교 봉사에서 돌아왔을 때에, 나는 어느 대학의 상급 헬라어 번역반에 등록하였다. 나는 곧 그 반에서 결코 계속 지탱해 나갈 수 없겠다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하였다. 날마다 그 반의 토의는 거대한 파도가 내 머리 위로 굴러 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선생님에게 찾아가 “이 반에서 계속 지탱할 수 없으니, 이반에서 빠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제안하였다.

       그 여자 교수는 나에게 “나는 당신이 계속 매어 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에 머물러 있어요. 그러면 목표에 이르는 것을 보게 하겠습니다”고하였다. 그 여인은 나를 줄곧 보았다. 끈질기게, 인내심 있게, 단호한 결심으로, 그 교수는 나를 아주 많이 도와 주어 결국에 가서는 그 과목을 통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에이(A)학점을 받게 하였다! 그 교수는 우리 하늘 교사의 한 실예가 되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반(학급)에 머무른다면, 우리가 통과하는 것은 물론이요 에이(A) 학점을 받는 것을 보는 것은 그분의 일이다. 그분의 직무는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다!

       우리 의복이 “흠이 없어야 하고” 우리의 “성품들이 … 죄에서 정결케 되어야”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함과 열심히 애씀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다. 그것은 “피를 뿌리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인데 물론 우리는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부지런한 노력은 항상 하늘이 사용하는 대리자들과 단순히 협력할 뿐이다.“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이 놀라운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3: 16절에 따르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바치신 것에 대하여 우리의 심금에 울리는 반응이다.“그 피를 믿음”(롬3: 25 난외 주)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는 효과적인 대리자가 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이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조항으로써 예수님을 받아들이나 그들은 자기들의 희생 제물과 구주로써 그분을 믿는 구원하는 믿음이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이 범한 율법의 형벌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그대는 자신의 대리인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범법한 죄의 빚을 갚으신다는 것을 믿는가? 그러나 그대로 하여금 죄 가운데 계속 머물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대로 하여금 그대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

       그대가 구원의 대가를 감사히 받아들일 때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갈바리의 잔인한 십자가 위에서 그대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그대가 느낄 때에 그대가 그분의 죽으심이 그대를 위하여 죄를 끝내게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구입물인 그대 위에 부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로운 성품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총명하게 이해하는 믿음을 가질 때에, 그대는 그러한 (믿는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엘렌 지. 화잇 리뷰 앤드 헤랄드 1888, 7, 24).

       그대는 믿음의 위대한 능력 중에 어떤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는가? 믿음 자체가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다. 그러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의가 인도하는 것은 “죄를 끝내고 의로운 성품을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와그너가 1889년에 감탄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놀라운 가능성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달성할 거룩함의 높이가 얼마나 높은가! 사단이 아무리 그리스도인의 육신이 연약한 그 점을 공격하면서 그에게 대하여 싸울지라도, 그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힘)의 충만으로 채워질 수 있다. 사단보다 더 강하신 자가 그 마음 속에 거하실 수 있다(영문 시조 1889,1, 21).

       “죄를 끝낸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 답변이 분명하다. 그것은 죄있는 천성이나 시험을 받음에서 끝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죄있는 휴전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데서 끝난다거나 우리가 죄를 지은 결과들인 내부나 외부로부터의 강력한 유혹의 세력을 느낌으로서부터 끝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러한 압력들에 반응 하기를 끝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부나 외부에서 오는 모든 시험에는 아니오! 라 하고, 성령님께는 예! 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참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시40: 8).

       그것은 육신에 소속된 본래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예수님이라도 목수로써 망치질 하실 때에 때때로 못이 빗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죄로 정의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죄는 의지와 관계가 있으며 선택과 관계가 있다. 의지 작용에 대한 동사들을 주의하라.

       악한 말하는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것과 함께 시작한다 ···불결한 생각이 허용되고 거룩지 않은 욕망을 품으면 영혼은 오염되며 영혼의 고결함이 타협된다. …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바로 그 시초부터 뿌리쳐야 한다. ···모든 정서와 욕망은 이성과 양심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 모든 거룩지 않는 생각은 즉시로 배척되어야 한다.·--

       아무 사람도 죄를 범하도록 강요 받을 수 없다. 그 자신의 승낙이 먼저 있어야 한다. 격정이 이성을 지배하기 전, 죄가 양심을 정복하기 전에, 영혼이 죄가 되는 행동을 목적 삼아야 한다. 시험이 아무리 강하다할지라도

죄에 대한 변명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교회증언 제5권p. 177).

       루터는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지킬 수 없지만은 우리 머리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지혜롭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우리 구세주께서 하신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또한 “모든 점에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시험에 대하여 항상 “아니!”라고 말하기를 선택하셨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한다(요5: 30). 죄있는 자신과 자신의 요구에 대하여 아무리 끈덕지더라도 “아니!”라고 하는-이것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항상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믿음이 어느 사람으로 하여금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를 총명하게(이해력 있게) 그분의 계신(인격) 그대로 계속하여 생각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킬 터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바라봄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와그너 저 그리스도와 그의 의 5페이지).

       어떤 이는 물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아는(알려진) 죄만을 이길 것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모든 죄, 심지어 그들에게 지금 알려지지 않은 죄까지 이길 것이라는 뜻인가?” 죤스와 와그너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속죄”의 봉사가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죄, 심지어 그들에게 지금 알려지지 않은 죄까지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이해하였다. 모든 역사 중에 가장 큰 두 가지 죄가 알려지지 않은 죄들이었는데: “아버지시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 34) 하시면서 예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염려하여 하신 기도 이었으며, 또한 라오디게아의 뜨뜻미지근한 두려운 죄는 어떤 상태에 그 원인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교회가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계3: 17).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나라로 결코 죄를 승천시키실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그러한 묻혀진 씨들이 새로이 싹터서 우주를 어지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1893년 대총회 회기 중에 죤스는 성소를 정결케 하시는 이때에 주님께서 하시는 단순하고 실제적인 봉사를 설명하였다.

       자, 이제 그것을 조금 멀리 옮겨 갑시다. 그분(그리스도)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분이 그들을 사셨을지라도-우리의 허락 없이는 죄들을 취해 가시지 않으실 것입니다.···내가 그분을 소유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차라리 나의 죄를 가지고 있기를 원하는지에 대하여 선택은 영원히 나에게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회중: “예”]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죄라고 보여 주시는 이 무엇이라도 떠나 가도록 할 것에 대하여 아무 주저할 것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죄가 지적되면 죄를 가게 하시겠습니까? 죄가 당신에게 지적되어

나타나거든 “나는 죄 보다 차라리 그리스도를 소유 하리라”고 말하시오, 그리고 죄를 가게 하시오(회중: 아멘). 주님께 “주님이시여, 지금 저는 선택합니다. 저는 교환합니다. 저는 당신을 선택합니다. 죄는 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좋은 어떤 것을 받았습니다. ···”라고 단순히 말씀 드리세요. 우리 중 아무든지 세상에서 우리 죄 때문에 실망하게 할 기회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여기 있는 형제들이여 바로 이것이 이루어졌습니까? 그들이 이곳에 거저 왔으나 하나님의 용께서 그들이 전에 한번도 보지 못하였던 어떤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전에 일찍이 들어가셨던 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셔서 그들이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주님께 사실이 그러하였다고 감사하는 대신에, 또한 악한 일들을 전부 가게 하고 그들이 전보다 그분을 더욱 많이 소유한 것을 감사하는 대신에 그들은 낙심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오 나는 어찌하나! 내 죄가 그렇게 많은데” ---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에 생각지도 않던 죄들을 가르쳐 주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깊은데 내려 가셔서 마침내 밑바닥까지 내려 가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뿐이며, 그분이 당신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불결하고 불순한

마지막 사건을 찾아내셔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때에, 우리가 “저는 죄보다 차라리 주님을 소유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행위는 완전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이 그 성품 위에 찍힐 수 있습니다(회중 :“아멘”).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 완전하신 충만함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차라리 그대가 전에 결코 알지 못하던 그대를 덮은 어떤 죄들과 더불어 그(완전)만 못한 것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죄에 둘려 있는데 어떻게 우리 안에서 나타난 그분의 완전하신 성품의 자국인, 하나님의 인이 우리에게 찍혀질 수 있을까요? 그분은 우리에게서 당신의 완전한 성품의 자국을 보시기 까지는 우리 위에 그 자국(흔적)의 인을 찍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가 꿈에도 상상 못한 깊은 곳까지 파고 내려 가셔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분은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며, 악의 최후의 흔적까지 드러내실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그분으로 하여금 찾으시는 그 일을 계속 하시도록 하십시오. ·--

       만일 주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게 우리의 죄를 치우신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끼칠까요?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를 단순히 기계로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곡괭이나 삽 같지 않은-현명한(총명한) 도구들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산 선택에 따라 주님에 의하여 쓰일 것입니다(대총회 회보 404, 405페이지)

       이것은 바울이 말한 것이며 그때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 14).

       엘렌 화잇이 이 중대한 개념을 굳게 지지한다. “그대의 환경들은 그대의 눈에 띌 정도로 그대의 성품에 새로운 결함들을 초래하는 데는 기여하여 왔으나, 그대 안에 있던 것을 드러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9,8,6). “그분의 눈은 ··마음의 각 방마다 살피시어 모든

숨어 있는 자기 기만을 간파 하신다.” (That I may Know Him, p. 290). 발견되지 않은 성품의 특성들이 ---드러나지 않으면 안된다”(교회증언 제7권 [영문] 210 211). “하나님께서는 ···숨은 결함들 …그들의 마음의 도덕적인 꾸밈을  나타내신다”(교회증언[영문] 제4권85).

“대속죄일이 마칠 때에 ···남은 교회는 … 그들의 생애 중에 죄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한다” (교회증언 [영문] 제5권 472, 473). 성소 봉사가 어떻게 의식하지 못한 죄를 마음에서 미리 옮기는 모형이었는지도 역시 참고 하라(부조와 선지자 [영문 페이지]201, 202, 357, 35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의 가장 깊은, 깨닫지 못한 죄를 드러낸다(시대의 소망[영문] 58, 리뷰 앤드 헤랄드 1900, 6, 12). 그리고 마지막 심판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깨닫지 못한 마음의 감추인 의도를 폭로할 것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6, 11, 10).

       이 진리와 1888년 그리스도의 의의 계시와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위치에 계셨으며,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 그분 안에서 인간의 모든 약점을 충족시키므로 조금이라도 시험을 받는 지상의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시험을 대항할 능력을 발견한다. 그것이 사실이다(죤스, 대총회 회보, 234, 1895).

       우리는 “모든 시험에 대한 승리”가 결코 “거룩한 육체”나 “완전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와그너로 하여금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어떤 오해한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에게서 독립하여 살 수 있을 만큼 여러분과 내가 끊임없이 아주 좋아지리라는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이 몸이 변화(개조)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썩을 것이 주님께서 오실 때에 썩지 않을 것을 입을 것입니다. 그 이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육체가 죄없다는 생각을 가질 때에 자기들의 죄있는 육신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과 대치하고 었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들을 두는데, 그것이 바로 법왕권의 진수입니다(대총회 회보, 146페이지 1901).

       예수님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죄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은 그분의 믿음을 가질 것이다. 와그너는 계속한다.

       심지어 죄있는 육신으로라도 죄없는 생애를 살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그분은 육신으로 죄를 정죄 하셨습니다. 그분의 완전한 생애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곱 재앙 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것입니다. ·--

       만일 이 능력이 은혜의 기간이 끝나기 전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타날 수 없다면-본문 그대로)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어떤 증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기간이 끝나기 전에 비록 그들이 죄있는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 아주 완전한 한 백성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죄없는 생애를 살 것입니다.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으로 죄없는 생애를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신의 생애들을 지배하시는 것을 그들 안에서 실증하신 분께서-죄있는 육신으로 죄없는 생애를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반박받을 수 없는 어떤 증언이 될 것인데-즉 그 이상 더 큰 증거가 주어질 수 없는 어떤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끝이 올 것입니다(상동 146, 147 페이지, 1901).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과 같이 이긴 하나님의 백성이 이 마지막 날에 외람된 입장을 가장 하면서 “작은 그리스도들”이 될 것이라 하는 뜻인가? 그러한 불경스러운 추리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비록 1888년 기별자들이 “모본을 본뜬 (copy the Pattern)” 한 백성을 하나님께서

소유하실 것이라고 주장 하였을지라도 그들은 결코 어떤 모양으로 그 백성들이 그 모본과 “동등(equal)”하다고 암시하지 않았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영원을 통하여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생애를 사셨으며 제물로 죽으셨다. 그러나 속량을 받은 아무 죄인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무죄 방면과 생명으로[인도하는]” 그분의“의의 행동”(롬5: 18 RSV)을 여전히 복제(duplicate)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아무도 그 진가를 0|해할(appreciate) 만큼 일찍이 배울 수 있는 자도 없다.

       깨어진 거울의 가치 없는 조각들이 깨끗하게 닦이고 빛나게 되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할 정도로 태양의 찬란함을 반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태양과 동등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특히 “해같이 밝게”(아가 2: 1O RSV) 된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빛을 반사할 뿐이요, 그 근원은 그리스도 이시다.

       중요한 질문은 도대체 무가치한 깨어진 거울 조각이 그리스도께서 돌아 오시기 전에 언젠가 깨끗하게 되고 빛나게 될 수 있느냐? 도대체 그렇게 깨어진 조각들인 144,OOO이, 하나의 진귀한 집합적인 보석으로 구세주의 성품의 독특한 면을 각자가 반사하여 “그가 자기의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시기 까지 언젠가 빛나게 될 수 있는가? 각 조각들이 마침내는 정결케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각자가 계속 죄를 지으므로 더렵혀지고 오염되어 있어야만 하는가?

       만일 예수께서 “모든 면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히4: 15 RSV)셨다면, 그분이 대제사장으로써 당신의 봉사를 마치시는 때에 당신의 백성도 또한 그들이 아직 죄있는 본성을 가진 죄있는 육신가운데 있는 동안, “죄 짓기”를 그친다는 것이 가능할까?

만일 그 답변이 예! 라고 하면 그분의 신부가 그분의 오심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하다. 만일 그 답이 아니요! 라면“어린양의 혼인’은 결코 올 수 없으며 재림은 그 실현 가능성의 소망이 되기를 그치지 않으면 안된다. 1888년의 소망과 용기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어떤 이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든지 없든지는-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나, 그러한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각 족속과 나라와 대표자들-온 세계의 백인들과 흑인들과 황인들과 홍인들, 주로는 가난한 사람들-어떤 부자들과, 약간의 위인들과, 대 다수의 소인들: 모든 성향의 사람들, 모든 족속과 국적으로-구성된 한 백성이 있을 터인데, 모두가 다 동시에 같은 것을 말하며, 모두가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을 일입니다. 지금 만일 우리가 반드시 되어야 할 일을 믿고 안다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와그너, 대총회 회보 149, 1901).

       하나님께서 죄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죄있는 육신으로 완전한 생애를 살도록 끝까지 구원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세상에 전하도록 이 증거를 주셨다면, 그분은 무기력함을 제거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생활할 보다 나은 환경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이로운 일은 우선 죄 있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수 많은 제자들 안에서 재현되고 증가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소수의 간혹 나타나는 몇몇 경우에 만이 아니라 전 교단 안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성품]가 세상에 나타날 것인데 그러면 그것이 사람들을 구원 하든지 아니면 정죄 하든지 할 마지막(더할나위 없는) 마무리 작업이 될 것입니다(상동 p. 406).

       엘렌 화잇은 이 용기를 주는 개념에 동의한다. 그리스도의 실물교훈의 거의 결론에 나타나는 이 문구를 주의하라.

       이 세상을 덮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두움이다. --- 이때를 당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이 전하여져야 할 것이니 이 기별은 광명을 던져주는 감화력과 구원의 능력을 가진 기별이다.

       신랑이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백성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쳐야 한다. 세상에 비칠 마지막 자비의 빛, 세상에 전파 되어야 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저들은 저희 생애와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들을 위하여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나타내어야 한다(COL 415, 416, 실물교훈 436, 437 참고).

       신랑에 대한 생각은 성경의 그림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불안스럽게 다가온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어린양의 신부가 마지막으로 단장하게 되는 “세마포”를 구성한다(계 19:8,7,RSV)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즐겨 기쁘게 순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이김(overcoming)에는 독특하게 마지막 세대에 적용할 수 있는 종말론 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전 세대에는 주님께서“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도달하지 못하도록 금하셨기 때문에가 아니라, 단순히 이전의 아무 시대에도 사실 계시록이 그리스

도의 신부에게 요구 하는것-그의 “신부가 자신을 준비 하였다”(계 19:7 RSV)는 조건을 일찍이 도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혼식에 신부와 꽃 바구니 드는 어린 소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양편이 다 인간이며 양편이 모두 여성들이나 에베소 4장에 있는 바울의 문구를 빌리면 한편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다. 그 여인은 마침내 동정과 이해로 그의 곁에 설 준비가 되었다. 이제 그 여인은 결코 그 남자와 동등(equal) 될 수는 없으나 꽃 바구니 드는 어린 소녀와는 달리 마침내 그 남자를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다(appreciate).

       주님께서 우리를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사 그의 크신 희생을 감사하게 받아 들이는 자들을 위한 그분의 종말론적인 목적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사랑의 신비들을 우리와 나누셨는가? 그의“아내가 예비 하였”을 때, 그분은 그 여인을 주장하기 위하여 오실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로 데려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RSV)고 신랑은 말씀하신다. 어떤 의미로 결국 상호 사랑과 동정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참된 연합, 하나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1888년 기별의 참된 부담이었다.

       참된 그리스도인 완전은 꽃 바구니를 드는 어린 소녀가 “머리 되신 그에게 곧 그리스도에게 까지 모든 면에서 자라”날(엡 4: 15 RSV)수 있는 입장에 처하도록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들 속에 믿음을 계발시키는 것이다. “각 세대마다 소수의 약간명이” 자신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성품의 일면을 반사하는 의미에서 현저하게 승리 하였다. 에녹과 엘리야가 눈에 뜨이는 그 실예이다. 그러나 그 소수의 사람들은 결코 최후 장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직면 하여야 하는 시험의 충분한 범위를 직면하지 않았다. 독특한 의미로 마지막 세대가 그리스도께서 마신 잔을 마시고 그분이 받으신 침례를 받을 것이다. (엘렌 지. 화잇 저 초기문집, 291, 292, 교회증언[영문], 제1권 183페이지와 마태복음 20: 20-23. 표준 개역성경[RSV]을 비교하라. 에스 엔. 해스켈저 선지자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은혜의 시간이 끝난 후 야곱의 환란기 동안에

믿는 자들에게 적용한 곳인 253, 254페이지를 역시 참고하라).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하나의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인데 처음 세장에는 발전되는 비극적인 음모가 있고 마지막 네장에는 다가오는 환원의 절정이 있다. 승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었다. 당신의 백성이 할일이라고는 자기들의 주님께서 이룩하신 그 놀라운 성취를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전부이다.

       왜 아무 이전 세대나 성도의 집단이 일찍이 어린양의 혼인을 위하여 준비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어떤 것을 보류하여 두셨기 때문이 아닌 것은 마치 꽃바구니를 드는 어린 소녀가 신부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어떤 것을 보류해두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언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의 독특한 어떤 봉사가, 자라나고 있는 신부 및 준비되고 있는 신부와 동시에 일어날 사건임을 지시한다: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단 8:14). 고대 모형의 대속죄일에 어떤 일이 백성에게 표상적으로 일어났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고 하셨다. 그와 같이 원형의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 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로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3:3). 이 제물들은 죄 자체의 반경인 자기 중심적인 관심은 벗어난 자원하는 제물이 될 것이다. 진실한 신부는 자기가 식권을 원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그 신부는 남편을 고마워 하고 그 관심은 남편에게 있고 자기에게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시대에 남은 교회는 결혼식에 꽃바구니 드는 들러리 소녀 이상의 신부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보상을 얻기 위하여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좀 얻기 위하여 욕심내며 관심을 둔다. 새 예루살렘의 창조물의 기쁨을 즐기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더 관심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자기들의 봉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자가 그렇게도 드문 이유이다. 신랑의 명예와 신랑을 옹호하기 위하여 관심을 두어야 하겠다고 느끼는 자가 별로 없다.“면류관

쓰네 내 아버지집”은 우리가 노래 부르는 곡이지만 “그분께 많은 면류관을 씌워 드리라”는 노래는 흔치 않다.

       그분에 대한 관심이 이러한 참된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각이 1888년 기별자들의 발표를 특징 지으며 또한 독특하게 그러하다. 좀처럼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의 서적에 표현되지 않은 “큰 개념”* 이라는 이 실예를 생각하라.

* 그 문구는 엘렌 지. 화잇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 진리의 귀중함이 너무나 크고 참 너무나 멀리 미치며, 너무나도 깊고 아주 넓어서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백성들이 그 큰 개념을 포착하고 성경에 감추인 진귀한 광석을 파낼 수 있도록 설교하라(원고7, 1894; 복음전도[영문]

169). 이 문구는1888년대의 열성이 일어나는 동안에 만든 말이었으므로, 죤스와 와그너 기별에 의하여 감동되었던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작은 뿔-죄악의 사람, 불법의 비밀-이 자신이 … 사제직을 … 하늘의 거룩하신 제사장의 자리에 대치한 것을 보아 왔다.·-- 불법의 비밀의 이 사제직과 봉사에 있어서는 죄인의 자기 죄들을 사제에게 고백하고 나서 계속 죄를 짓는다. 사실 그 사제직과 봉사에는 그들이 비록 자기들의 죄를 고백한 후에라도 계속 죄 짓는 것 외에 아무 달리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묻기는 송구스럽지만 불법의 비밀에 속하지 않고, 참으로 예수를 믿고 그분의 제사장직과 봉사를 믿는 사람들에게도-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나서 계속 죄 짓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에게와 그분의 희생과 복스러운 봉사에 대하여 이것이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가? (죤스, 헌신한 길 121, 122).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분과 그분의 영광을 위한 관심-이것이 세상에서라도 우리 자신과 자신의 개인적 구원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가 이 죽을 육신 가운데 있는 동안 언젠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4: 18) 즉“두려움을 몰아 낼 완전한 사랑”을 이해 하도록 배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 자신의 문제들과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한 관심을 벗어나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 두기 시작하는 그들의 시야를 가질 때가 오고 있다고 스가랴 12:10에서 우리는 읽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가까운 사랑하는 친구를 위하여 통곡 하듯이 그를 위하여 울 것이다” 남은 교회가 뜨뜻 미지근한 이유는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관심으로 말미암아 동기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고상한 동기 부여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 것이다(고후 5:14).

       죤스와 와그너는 이것을 이해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기별 중에 중요한 부담이었다. 죤스는 계속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과 그분의 봉사를 실제적으로 “멸망의 가증한 것”과 같은 수준에 놓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봉사 앞에는 ‘불법의 비밀’과 마찬가지로 능력이나 은덕이 없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주님께서 이날에 더 이상 지체없이 당신의 교회와 백성을 구원하여 다시는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과 그의 두려운(소름 끼치는) 희생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봉사를 그와같이 낮추게 되지 않기를 바라신다(상동,122).

       우리가 그분을 위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는 관심을 배울 때에, 우리는 그의 친근한 성경 구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 14: 7)라는 말씀의 새로운 차원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어두움이 ···세상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그분의 성품이 … 알려지게” 할것이다(COL415, 실물교훈 436 437 참고). 이리하여 그분의 심판의 시간에 그에게“영광을 돌릴”것이다(계14: 7).

       우리들 중에 대부분은 우리가 계속하여 “주여, 나와 나의 사랑하는 것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잊지 마옵소서. 또한 선교사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우리로 영광스러운 본향에 갈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할 때에 우리의 깊은 속에 내적 동기부여의 죄가 있음을 부인한다! 확실히 지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더욱 광대한 기도로 기도하기를 배울 때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며, 죄를 변명하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가 우리의 계속 죄짓는 것을 덮어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폐기론 이다. 우리가 “정욕을 [충족 시키기]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은 우리 구주를 영화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롬 13: 14). 순간적으로, 갑자기 매혹하면서, 거의 제압하는 시험에, 요셉은“아니”라고 말하였다. 요셉은 거절하며 말하기를“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 8, 9). 이와같이 하여 요셉은 자기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였다. 만일 요셉이

“육신의 일을 도모하”며 자기에게 말하기를 “너는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없어, 이 시험은 너무 강하거든,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이야-그리스도의 의가 이 하나의 죄에 관하여 틀림없이 나를 덮어 줄거야” 하였더라면 얼마나 비극이 되었을까!

       마지막 날 중요한 논점은 우리 자신의 불쌍한 어린 영혼들의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존영에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 천사의 호소이다. 은혜의 시기가 마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올 그 시험은 짐승의 표의 시험일 것인데, 심지어 고대 순교자들이 견디었던 것보다 더 큰, 이전의 모든 역사 가운데 그들에게 결코 오지 않았던 시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시험하는 그의(사단) 6,OO0년간의 경험을 쌓은 후에 완성된 사단의 걸작품일 것이다. 그 시험(test)은 우리 영혼들의 깊은 곳까지 관철하여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불법의 최종적 조류에 휩쓸려가게 하려고 영리하게 고안될 것이다. 그러한 최종 시험은 최종 준비를 틀림없이 요구한다!

       한편 아담의 아들과 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사단의 비웃는 비난을 우리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반면에, 우리는 본성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이라는 것과 우리는 언제나 구세주가 필요함을 여전히 알아차리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아버지와 더불어 한 대언자,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요일2: 1, RSV). 성령께서는 뉘우치는 타락한 죄인의 마음에 항상 좋은 소식을 끈덕지게 역설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과실로 인하여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 것이다. 비록 우리가 원수에게 실패를 당하였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거나 싫어하는 바 되거나 배척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정로의 계단 [영한 대역] 153, 155)

       예수께서는 비록 그들이 실수를 범한다 해도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 ···그들이 도움을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기들의 최선을 다할 때에 비록 불완전 할지라도 그 봉사는 받아주시는 바 될 것을 확신하라. 예수님은 완전하시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입히우며 또한 그분의 그 더러운 옷을 그에게서 벗기라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갈아 입히라고 말씀 하신다. 예수님은 피치 못하는 우리의 결함들을 고치신다(편지, 17a, 1891, Naval F. Peace, By Faith Alone, 241에 인용됨).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어느 한 사람이 길에서 이탈 한다면, 만일 예수님을 확고히 보는 데서 어느 순간 돌이킨다면, 그것은 그가 고의적으로 죄를 짓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의 실수를 보게 될 때에는 그는 또다시 돌이키고 다시 그의 눈을 예수님께로 고정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잘못한 사실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에 보다 덜 사랑스럽게 하지 않는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6, 5, 12).

       만일 그대가 실수를 저지르고 또한 죄에 빠졌다면, 그대는 기도할 수 없다고 느끼지 말라. ···오히려 주님을 더욱 열심히 찾으라(엘렌 지. 화잇, Our High Calling, p. 49).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단의 비난을 지지하는 문맥을 쉽게 잡아 뗄 수 있는 한 문장이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사람이 자기 능력(ability)의 최선을 따라 수행하고, 십계명에 순종함으로 주님의 길을 지키려고 노력할(추구할, seeks) 때에, 그리스도의 완전(perfection)이 뉘우치고 순종하는

영혼의 범죄를 덮기 위하여 입혀주시는 바가 된다(교육의 기초 영문135).

       그러나 이제 중요한 문맥을 주시하자. 우리는 이길 수 있다! 같은 페이지 그 다음에서 우리는 읽는다:

       우리는 갈바리 십자자에서 타락한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드님을 희생시킨 대가를 볼 수 있다. 사람을 위한 희생이 완전하였던 것처럼 죄의 더럽힘에서 사람의 회복도 철저하여야 하고 완전해야 한다.---범하기 쉬운 죄는 싸워 이겨야 한다. 못마땅한 성품의 기질은 유전된 것이거나 계발된 것이거나 관계없이 따로따로 찝어냄을 받아 의의 대 기준에 비교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반사되는 빛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그것들은 단호하게 제지되고 정복되어야 한다(상동 135, l36).

       엘렌 화잇은 짐승의 표를 완전히 저항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암시하는 교활한 율법 폐기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단은 우리가 그것을 믿기를 원한다. 아마 우리도 확실히 그럴 것이다! )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대언자가 있다” (요일 2: 1).

우리에게 구세주는 영원히 있으나 대언자나 중보자는 영원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영감은 우리에게 말한다 (GC 425. 대쟁투 하권 193, 194 비교하라).

       짐승의 표의 시험을 직면하도록 한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은 대제사장으로써 당신의 마치시는 봉사 가운데 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이다. 이것은 일찍이 재림운동의 초창기에 엘렌 화잇에게 분명하였다.

       예수께서 성소봉사를 마치시고 지성소에 들어가셨을 때에… 셋째 기별을 가진 다른 힘센 천사를 세상에 보내었다.···이 기별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 앞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뇌의 시간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경계 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천사가 말하였다. “저들은 짐승과 그 우상과 접전하게 될 것이다” ---이 기별을 포착하는 모든 마음들은 지성소로 향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예수께서 법궤 앞에 서서 아직 자비가 걸려있는 모든 사람과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을 위하여 마지막 중보를 하고 계신다(EW 254. 초기문집, 260 참고).

       지성소에서 그리스도의 마치시는 중보 사업의 빛으로 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것은 짐승의 표의 시험을 직면하도록 당신의 백성을 준비시키기 위한 주님의 대책이다. 이것이 1888년 기별의 부담이었으며,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장의 제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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