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원 얻기가 쉬우며 잃어버리게 되니가 어려운가?(아니면 그 반대도 또한 같은가?

Posted in 완전 문제와 승리

왜 구원 얻기가 쉬우며 잃어버리게 되니가 어려운가?(아니면 그 반대도 또한 같은가?

저자: 롸벌트 제이 윌랜드

       만일 예수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셨다면 사실 그것에 대하여 아무 질문도 있지 않아야 한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말씀 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선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많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서 의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 얻기는 쉽고 잃어 버려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움이니라(마11: 28-30 ).

       얼핏 보기에 인간성은 그분의 멍에가 어렵다고 믿는 의향이 있다. 많은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그 의무를 지기가 지독하게 어려워 다만 몇 사람만 실현하기 위하여 바라볼 수 있는 영웅적인 달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기를

성실히 바라는 어느 사람이라도 좌절시키고 낙심시킬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이 인용은 이장의 표제의 절반을 차지한다. 다른 절반은 바울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잡혔을 때 주님과 가졌던 대화에 대한 바울의 보고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직접 끌어낸 것이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그 경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자들을 둘러 비추는 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양심을 찌르는 것을 차버리기가 네게 어려우리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26: 13-15 ).

       다소의 사울은 자기의 양심과 싸우고 있었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한 계속적인 확신을 그 심령 속에 밀어 넣으셨다. 그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 자기의 미친 운동(혹은 野戰, campaign)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는 성령의 모든 확신과 각성을 진압하고 무의미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어려웠으며 그것이 그에게 심한 육체적, 정서적 혼란으로 인도하였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를 대단히 사랑하셨으므로, 바울이 계속 뉘우치지 않는 것 때문에 자신을 파괴 하는 것을 곤란하게 하셨다. 그리고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었을 때에, 그는 그 경험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는 항상 구원 얻기는 쉽고 잃어버려지기는 어렵다는 것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좋은 소식(복음)”을 발견하였다.

       이리하여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그분의 짐은 “쉽고” 그분의 구원을 반대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한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의미인데, 1888년 기별자들이 예수님과 바울의, 그 가르침을 포착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좀처럼 똑똑히 표현하지 않는 또 하나의 그들의 기별의 독특한 면모이었다.

       예를 들어, 표면상 애매하게 보이는 바울의 한 성경 구절을 생각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싸우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 :16, 17).

       이 말씀을 이해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1) 육신이 우리에게 하도록, 부추기는 악이 너무 강하여 성령이실지라도 우리를 도우시기에는 무능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우리가]하고자 하는 그 [선한]것들을 할 수 없다”. 아니면 (2)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하시는 그 선이 아주 강력한 동기를 주게 되므로 육신은 우리에게 대한 그 지배력을 잃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 신자는 육신이 본성적으로 자기에게 하도록 자극하는 그 [악한] 것들을 할 수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설명 (1)은 나쁜 소식이다. 그대가 죄있는 본성을 가지고 “육신”안에 있는 한, 그대는 계속 패배할 운명에 처하여 있다. 그런데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들의 실제적으로 믿는 것이다. 그들의 경험은 끊임없이 이러한 소신을 강화 하는데 이는 그들의 육신의 전능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식욕, 불법적인 성, 육욕, 자만, 질투, 증오, 마약, 술, 물질주의는 항상 성령을 격퇴한다. 그리고 그들은 빈번히 자신들이 실패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확실히 구세주의 마음은 그들에게 쏠린다. 그분은 그들이 낮에 실패한 것을 반성하면서 밤에 얼마나 여러 번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지 아신다.

       다른 한편 설명 (2)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좋은 소식으로써 나타난다. 성령께서는 실제로 “역사”하시고 즉 “싸우”시고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바울에 의하면) 이것이 신성의 크신 셋째 분이 하시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몰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분은 육신보다 강하시다. 그분은 우리의 죄 있는 본성의 부추김을 대항하며 매일 매순간 싸우신다. 그리고 우리의 동의를 얻어 그것들을 완전히 패배시킨다. 사실 그분은 마치 지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이 죄에 대항하는 계속되는 싸움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각 사람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보내신다. 우리의 죄있는 본성을 대항하는 그분의 싸움은 하루 24 시간, 일주 7 일의 작업이다.

       두 설명 중에 어느 것이 맞는 설명인가?

       1888년의 기별은 주저하지 않고 좋은 소식편의 설명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내짐은 가볍다”고 보증하신 그 무거운 무게를 능하신 성령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당신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에이

티. 죤스는 바울의 의미를 분별하였다.

       어떤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능력아래 있게 되면, 그가 실제적으로 육신의 경향들과 욕망들과 함께 실제적으로 육신에게서 분리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그 동일한 타락하고 죄있는 육신은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더 이상 이것들에게 지배 받지 않는다. 그는 육신의 경향들과 욕망과 함께 육신의 지배에서 구원 받으며, 이제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그는 이제 육신을 정복하고, 진압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제지하는 어떤 능력의 지배하에 있다. ---육신 자체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지배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악한 것들은 그 근원에서 죽음을 당한다. 그리하여 그런 것들이 생애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예방된다. ---

       사태의 이러한 복스러운 역전은 개심에서 일어나게 된다. 개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의 소유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하나님의 영의 지배아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 능력으로 그는 그 모든 육신의 애정과 정욕들과 더불어 육신을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그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때에 성령을 통하여 애정들과 정욕들과 더불어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으되 사람이 처하여 있는 바로 그대로 그 육신을 자신이 입으셨다. 그리고 그 모든 육신의 경향성과 욕망들이 있는 바로 그대로 그 육신을 만나셨다. 그리고 당신께서 가져오신 그 거룩한

능력으로 그분은 그 “육신에 죄를 정[죄]하셨다.” 그리고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인류에게 그 거룩한 믿음을 가져오셨는데 그것(믿음)이 인간이 처하여 있는 바로 그대로 육신의 권세와 죄의 법으로부터 그(인간)를 구원하고, 있는 바로 그대로의 육신에 대한 자신 있는 지배력을 그에게 주는 신성한 능력을 인간에게 초래하는 것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900,9,18).

       무엇이 더 강한가? 죄인가 아니면 은혜인가? 바울은 말한다.“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사망에 이르도록) 왕 노릇한(다스린)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한(다스린)다” (롬5: 20,21). 이것이 믿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티. 비. (TV)가 기도회보다 더 강력하다고 생각하여 왔던가?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우리를 붙잡는 세상의 포착이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성령의 역사가 매우 약한 것처럼 비교적으로 우리에게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것이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좋은 소식을 위하여 1888년 기별로 또 다시 들어간다.

       은혜가 다스리는 때에는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 그른 것을 행하기 보다 더욱 쉽다. 저것은 비교이다. 주의하여 보라. 죄가 다스리는 것과 같이 은혜도 다스린다. 죄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모든 능력을 격퇴한다. [그것이 바로 다소의 사울이 가시채를 뒷발질(양심의 찌름을 항거 하여 발길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죄의 권세가 깨어지고 은혜가

주권을 잡으면 은혜가 죄를 다스리며 죄의 권세(능력)을 격퇴한다. 그래서 죄가 다스리는 때에, 바로 행하기보다 그릇 행하기가 쉬운 것이 사실인 것과 같이, 은혜가 다스리는 때에 그릇 행하기 보다 바로 행하기 쉽다는 것이 실제적이다 (죤스 상동 1899, 7, 25).

       죄의 통치하에 그릇하기가 쉬운 것과 같이 은혜의 통치하에 옳게하기가 꼭 같이 쉽다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죄 안에 있는 것 보다 은혜 안에 더욱 많은 능력이 없다면 죄에서 구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확실히 죄 안에 있는 것보다 은혜 안에 더욱 많은 능력이 있다는데 달려있다. ···은혜가 없이 그릇하기 쉬운 것과 꼭같이 은혜의 능력이 주관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옳게 하기가 꼭같이 쉬울 것이다.·--

       [사람의] 큰 난점은 언제나 옳게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난점은 사람이 본성적으로 어떤 능력-죄의 능력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라는 것 즉 그 죄의 통치 안에 완전히 들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죄의) 능력이 다스리는 한 자기가 알고 또 하고 싶은 선을 행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죄가 지배해온 것보다 더 강력한 능력으로 하여금 지배하게 하라. 그러면 죄의 능력이 통치할 때에, 그 권세의 뜻을 섬겼듯이, 더욱 강한 능력이 통치할 때에, 그 권세의 뜻을 섬기는 것이 꼭같이 쉬울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그러나 은혜가 죄보다 단순하게 더욱 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록 그것이 좋을 지라도 모두다 그렇지만은 않다. ···죄 안에 있는 능력보다 은혜 안에 훨씬 더 많은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로 하여금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현재 살아 있는 능력 외에 아무것을 가지고라도, 그러니까 육체로(혹은 육신안에 있는)죄를 정죄하시고 의로 다스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 더욱 넘치는 은혜 외에 아무것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을 섬기려고 일찌기 시도도 하지 말게 하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으로 새로운 생애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며, 그때에 그분의 멍에는 참으로 “쉽고” 그의 짐은 “가벼움”을 발견할 것이며, 그때에 그의 봉사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상동 1986, 9, 1).

       여전히 와그너도 완전히 일치 하였다.

       새로 남은 전혀 옛 것을 대치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고후5: 17, 18), 자기의 유업의 몫을 위하여 하나님을 붙드는 자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유전적인 경향들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한, 자기 안에서 역사 하시는 의를 위한 어떤 능력을 소유한다. 이는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땅의 아버지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The Everlasting Covenant p. 66)

       와그너가 고린도후서 5 장에서 인용한 그 문맥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동기를 준다114절)고 말한다. 억제한다(restrain)의 정반대 강권한다(constrain)는 뜻은 “추진한다”, “(강력히)민다”는 뜻이다.

       예증하기 위하여 그대가 현대 차들이 있기 이전 먼 과거 어느 시대에서 부활한 불쌍하고 무식한 노예라고 상상하는 시도를 해보라. 그대의 주인은 크고도 묵직한 캐딜락을 언덕 밑에 세워놓고 있는데, 그는 그대에게 명령 하기를 “나의 캐딜락을 언덕 꼭대기까지 올려 놓으라”고 한다. 그래서 그대는 그대가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밀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근육을 최대로 긴장시킨 후에 몇치를 움직여놓고는 바퀴에 돌을 고여 그대가 달성한 것을 붙든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그대는 어떻게 언덕 위에까지 그 차를 올려 놓을지 의아해한다. (확실히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모로 보나 그렇게 어렵게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준비할 생각을 한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그때에 어떤 이가 와서 그대에게 말하기를 그 차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그대가 볼 수 있는 작은 열쇠를 돌리라고 말한다고 생각하라. 그대는 자동차 덮개 밑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것이 무슨 소리일까? 한다. 그런데 그대의 친구는 그대에게 변속 레버를 D(1번)위치로 움직

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 그는 “바닥에 있는 저 가속시키는 발판을 보라, 그것을 누르라”.

그 캐딜락은 붕 소리를 내며 언덕을 올라간다!

       그리스도인이 생애가 아주 어렵게 보이게 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순수한 참된 복음을 애처롭게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은 하나의 강력한 발전소이어서 산들이라도 평지를 만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니느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슥4: 6, 7).

       가파른 산을 평지로 만들기 위하여서는 강력한 V-8엔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우리를 위하여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 14, 15)

       이것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검토하라.

1. 만일 한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죽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가 사실 죽을 것이었다.

2. 우리가 이방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거나 또한 그분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않거나,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희생의 덕택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피로써 세상을 사셨다.

       우리는 이 세상 생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가 먹는 떡도 그의 찢어진 육체로 산 것이다. 우리가 마시는 물도 그의 흘리신 보혈로 산 것이다. 날마다 자기의 음식을 먹는 자는 성자나 혹은 죄인이나 간에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 받지 않는 자는 없다. 모든 떡 덩이마다 갈바리 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다. 모든 물 샘에도 십자가가 반사된다 (DA 660. 시대의 소망 제3권 147).

3. 바울은 이것을 단순하게 믿으라, 그러면 그대는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계속 살기가 불가능함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강권함이 즉시로 가서 일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이제부터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 것 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이다. (헬라어에서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말은 우리의 보통 부르짖는 헛된 외침인 “내가 좀더 신실해야 한다; 내가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내가 안식일을 더 잘 지켜야 한다; 내가 교과를 좀더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 뜻을 알리지 않는다. 그 개념은 그대가 일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대가 주님을 열심히 섬기지 안는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발견할 것이라는 것이다).

       구원을 얻기는 쉽고 잃어 버리게 되기는 어렵다는 이 개념이 바울의 가르침에 스며있다. 다음의 말씀을 고려하라.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2: 4)

       바울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많은 사람이 그분에 대하여 아는것 처럼 우리가 잃어 버림이 된 상태에서 버둥거리는 동안 흥미 없는 무관심으로 그분의 거룩하신 양팔을 팔장끼시고 뒤로 물러서 계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 하시지 않으신다.

“글쎄 나는 2000년 전에 너희를 위하여 희생하였다. 내 몫은 다했으니-이제는 너에게 달렸다. 네가 주도권을 잡으라. 네가 오고 싶으면 오고, 네가 어렵게 보인다면 그저 네가 그 어려움을 요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이 너의 면류관을 취하겠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렇게 느끼는지? 그러면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하나님께서는 내 면류관을 취하려고 대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신데-그분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분이 나를 참으로 원하신다고 확신이 안가”.

       그와 반대로 와그너는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찾으시는 그칠 줄 모르는 그 사랑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그가 좋아하는 복음 전도적인 문구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을 개선하려고 애를 쓰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고 말하며, 우리는 그것이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확실한 그만큼 각 사람이 회개를 향하여 인도 받고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영문시조 1895, 11, 21).

       그대가 사랑하는 자나 친구나 이웃을 위하여 개심하게 되도록 기도할 때에, 그대는 주님께서 하시기를 즐겨 하지 않으시는 어떤 것을 하시도록 주님을 깨우거나 권유할 필요가 없다-그것이 바울이 말한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미 회개 하도록 그대가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시고 있으며 인도하고 계시다. 문제는 그분이 이미 하시기 위하여 추구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자주 방해하는데 있다!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관용을 그것들의 참된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여 왔기 때문에 우리의 참된 응답을 좌절시킨다.

       이제 우리는 와그너로부터 계속 인용한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 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부요하심을 멸시하고 주님의 자비하신 인도를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을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확실히 회개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상동).

       그것은 많은 사랑하는 백성에게 혁명적인 소리로 들리므로 그들은(이렇게) 말한다. “글쎄, 나는 그것에 단순히 아주 동의 할 수 없는데! 만일 어떤 죄인이 구원얻으려 하면 그는 주도권을 잡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원 얻기 위하여 어떤 것을 하여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선후가 바뀐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아무리 혁명적인 소리로 들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복음의 좋은 소식이다. 그것은(복음의 좋은 소식) 하나님의 활동적이며 불굴의 사랑을 전제로 한다. 엘렌 화잇은 정로의 계단 59, 61(영한대역, SC 27)페이지에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저들을 이끌어 십자가를 쳐다보고 저희 죄 때문에 못 박히신 자를 주목하게 하실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어떤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

       죄인이 이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 끌려 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나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께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구원의 경륜에 대한 지식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고난을 당하게 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동시에 십자가의 믿음으로 이끌리게 할 것이다(정로의 계단 59, 61. Sc 27).

       일단 그대가 주님의 능동적으로 찾으시는 사랑의 비밀을 본다면 이 좋은 소식이 성경의 거의 매 페이지에 그대에게 튀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바울의 기록에서 나오는 이 아름다운 사상을 주목하라.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합이라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 23-4: 5),

       “갈라디아서 안에 있는 율법”에 대한 그의 분명한 관점과 더불어 와그너는 이 성경절의 참된 진리를 포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버리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창조된 첫 사람이“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 이래 모든 사람이 미성년기에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 상속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배운 대로, 비록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이 되었을지라도,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갇힌바 되어 (shut up)” 가혹한 주인에게 감시를 받게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약속을 받도록 인도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심지어 경건치 않은 자들, 곧 죄에 매여 있는 자들일지라도 당신의 자녀로 계산하시고, 방황하는 아들이지만 여전히 자녀들로 여기시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받는 자, (The Beloved) 안에서 받아주시는 바”가 되게 하셨다.

       이 시련(은혜의 기간 집행유예)의 생애는 그분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참 아들들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회를 주실 목적으로 우리에게 제공된다(반가운 소식 166, 167).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구약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율법아래 갇혀 있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믿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와그너는 오늘날이라도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 믿음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율법 아래 갇혀있다고 분명하게 하였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리고 가기 위한 우리의 몽학 선생, 혹은 훈련의 도구이다. 우리가 믿음으로나 은혜로 배우지 못한 것을 징계로 배운다.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후히 소비하시는 이 무한하신 관심(주의)은 모두 다 그리스도께로 가도록 우리를 지도하여,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예외없이 우리 모두 생애 가운데 믿음이 오는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율법아래” “갇혀”있다. 이 감금은 이끄시는 과정의 일부분 즉 또 하나의

주님의 집요하고도 적극적인 우리를 위한 개별적 사랑의 증거다.

       우리가 외견상으로 믿지 않는 우리 이웃들을 배제하는 한 원을 긋기가 아주 쉽다. 그러나 와그너는 주님께서, -적어도 그들이 끝없는 저항으로 마침내 그분을 격퇴하기까지는, -그들을 포함시키는 원을 그으신다고 알았다. 우리는 우리 사회 밖에 있는 자들을 이리로 여기고 양으로 생각하지 않는 수가 빈번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양우리를 떠나 방황하는 양으로 아니면 미성년자들로 내려다 보신다. 사실은 그들이 율법아래 갇혀 있지만 아직도 몽학선생이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가는 자녀들인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할지 좀처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4장은 모든 것을 상속 받는 자인 땅주인의 아들을 실례로 들어 우리를 이 아름다운 사상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그 아들은 맨발로 그 땅을 뛰어 돌아 다닌다. 그런데 종들이 그를 나이가 들 때까지 감독하며 다스린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다함께-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오는 성년에 도달하기까지는 미성년자들이며, 개구장이들이며, 종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놀랍게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의 전체의 계획은 잃어버려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셨다!

       이 두근거리고 고동치는(감동적인) 복음은 각 사람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와그너가 통찰해 보는 데서 더 멀리 드러난다.

       유업은 믿음의 의를 통하여 존재하는 고로 유업은 동일하게 모든 자손(후손)에게 확실하며 동일하게 모든 사람의 도달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기회를 준다. 왜냐하면 믿음은 저 사람 못지않게 이 사람에게도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시되 각 사람에게 같은 분량을 나누어

주신다. 왜냐하면 은혜의 분량은 믿음의 분량이기 때문이며,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엡4: 7). 그리스도는 각 사람에게 남김없이 주어진다 (영문 시조 1896,2,27).

       다른 말로 주님께서는 지상에 각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이를 위하여 실제로 무엇인가를 하시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분의 일은 그들이 그것을 알 때까지는 좌절된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자기들에게 전파될 때에만 그분의 일(역사)을 그들이 알 수 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고 촉구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설사 하나님의 은혜를 부패하게 하고 좌절시키는 유독한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복음 안에는 참으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위하여 노력하여 오다가 실패하였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비난하느니 보다 차라리 우리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물론 어떤 이는 복음이 본래의 순결성으로 제시될지라도 거절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이 분명하게 제시될 때에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죤스와 와그너의 기록들을 통하여 금실 같이 통과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로 수반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 …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함이 되지 아니 하였으니 저에게는(그안에는) 예만 되었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많을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고후 1: 19, 2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개인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받기 위하여 필요한 한가지 필수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당신의 부요함을 각 사람에게 거저 주신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때가 아니면 아무도 그 부요함들 중에 아무 몫도 받을 수 없다(와그너, 영원한 복음 46페이지).

           엘렌 화잇은 이 개념을 이렇게 동의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명은 그릇 나타내어지고 많은 사람들은 저희가 복음 사역자들에게서 격리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희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 할 것이다. 믿음이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곳에 사람이나 사단이 세울 장벽은 없다.

           베니게의 여인은 믿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쌓여진 장벽을 향하여 돌진 하였다. 그에게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을지도 모르는 예수의 외관에 상관하지 않고 낙심을 떨쳐버리고 구주의 사랑을 신뢰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가 당신을 신뢰하기를 바라신다. 구원의 축복은 각 사람을 위한 것이다. 누구든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선택 외에 다른 어떤 것이라도 있을 수 없다 (시대의 소망 제2권 162, 163).

           그렇다. 죄인이 잃어버려지려면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그 이유이다.

           그러나 1888년 기별은 복음의 관점으로 보아 잃어버려지기 보다는 구원 받는 것이 더욱 쉽다는 개념 저편으로 거인의 발걸음을 내 디디었다. 그것은 바울의 기록에 분명한 보증을 근거로 삼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죽으심이 죄인에게 그의 구원을 위한 준비를 제공한다는 것 뿐만아니라 그의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실제적으로 이룩하여 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분의 성령의 선물은 각 사람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것을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에 죤스와 와그너의 설명을 보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그런즉 한[아담] 범죄로 모든 (Greek, KJV)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그리스도]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아담]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 12-19).

           아담이 인류에게 전하여 준 것이 무엇이든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지워 버리셨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을 믿기가 어려움을 발견한다. 우리는 “아니요, 바울, 그것이 사실일 수가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의 거저 주시는 선물은 소수의 사람에게 이르렀지 모든 사람에게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들 위에만 이르렀습니다” 라고 말한다. 와그너는 바울의 개념을 파악한 것 같다.

           여기에 예외가 없다. 정죄가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같이 의롭다 하심도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 온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아니 그분은 각 사람에게 당신의 자신을 주셨다. 거저 주시는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 왔다.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그 사실이 예외가 없다는 증거다. 만일 의롭다 하심의 거저 주시는 그 선물이 어떤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이르렀다면, 그것은 거저 주시는 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의 선물이 지상의 각 사람에게 이르러 왔다는 것이 성경에 분명하게 진술된 하나의 사실이다. 그들이 영생을 받기를 원치 않는 단 하나의 이유 외에는 일찍이 살아온 각 사람이 구원을 얻어 영생에 이르지 않아야 할 최소한의 이유도 없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거저 주시는 선물을 걷어 차버린다 (영문시조 1896, 3, 12).

           그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리 이상하게 들린다 해도 그 말은 사도바울 자신이 말하는 것과 조화된다. 엘렌 화잇이 그 기별에 대하여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좋은 소식 이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고 좀더 호감적인 빛으로 제시 하였다.

와그너는 또다시 말한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초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은 주님 자신을 소유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자신을 주시는 것처럼, 이 믿음도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면 그대는 각인이 구원 얻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가?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믿음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제외하고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간직하기만(지키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상동 1896, 1, 16).

           죄인이 잃어버려지기를 고집한다면 그 죄인은 항거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참으로 헌신한 생애를 살 필수적인 동기는, 모든 이르러 오는 이 의롭다 하심의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이해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제공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동기를 준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 : 14, 15).

           바울의 의도가 그렇게도 분명한데 어찌 칼빈이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택하신 자를 위하여서만 죽으셨다는 생각을 용납할 수 있었을까? 하고 (어느) 사람이(든지) 의아해 한다. 단순하게 그분이 그대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으라. 그리고 당장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하라. 그대는 그분에게 영원히 그리고 무궁히 빚지고 있다. 이리하여 이제 이후로는 자기 중심적인 생애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방정식은 그 자체의 일부로 짜놓은 공급이 있다. 그 깜짝 놀라게 하는 진리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 얻기가 쉽게 된다.

           성경이 죤스와 와그너의 복음적 동기 부여의 큰 개념을 충분히 지지하는 것을 보이기 때문에 엘렌 화잇이 그들을 어떻게 지지 하는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엘렌 화잇도 같은 개념을 가진다.

           무한하신 사랑은 주님의 구속받은 자들이 땅에서 하늘까지 통과할 수 있는 한 길을 쌓아 올리셨다. 그 길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다. 안내하는 천사들이 우리의 실수하는 발을 인도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사다리는 각 사람의 길에 악습(타락)과 어리석음으로 향하는 그의 길을 막으면서 인간의 모든 길에 내려져

있다. 그는 죄의 생애로 향해 전진하기 전에 십자가에 달리신 구속자를 짓밟아야 한다 (Our High Calling p. 11).

           하나님의 사랑이 적극적(능동적)이며,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죄인이 잃어버려지기 위하여는 항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엘렌 화잇의 기록 가운데 절대적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안에는 전혀 어두움이 없으시다. 만일 빛이 없다면 그늘이 없을 것이다. 태양으로 말미암아 그늘이 생기는 반면에 그늘은 태양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지 않는다. 그늘을 일으키는 원인은 어떤 장애물 때문이다. 그와 같이 어두움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빛을 무시하는 것은 그 확실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이 그늘을 창조하며, 비쳐진 빛 때문에 어두움이 더욱 심하다.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 7). 하나님께서 아무 사람도 멸망 시키지 않으신다. 멸망 당하는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을 멸망시킬 것이다. 사람이 양심의 권면을 묵살시키면, 그는 불신의 씨를 심으며 이것들이 확실한 수확을 산출한다 (상동 26).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인들은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살인적인 복수와 피에 굶주림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에 대하여 비난을 당하며 때로는 당연하게 그러하다. 전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원수들에게 치명적인 살인 광선을 내는 어떤 종류의 신비한

우주총을 가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1888년 기별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그러한 아무 곡해를 제시하지 않았다. 두번째 돌아 오시는 분은 이같은 예수님이실 것이다. 죄인들이 죄를 부과하지 그분이(죄를 부과 하는것이) 아니다. 죄인들이 굳어질 것이요. 그분이 그렇게 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어느 사람이 수십 년 동안 하루에 여덟 갑의 담배를 피우고 폐암으로 쓰러진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멸망 시키셨다고 그가 말할 수 있는가? 사실 멸망 당하는 각 사람은 자신을 멸망 시킬 것이다.

           엘렌 화잇이 하나의 짤막한 문구에만도 일곱 번이나 구원받지 못한 자는 오직 그들 자신의 선택 때문이며 주님께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가해지는 독단적인 배척으로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말하는지 주의하라.

[1] 하나님을 반역하는 생애가 그들로 하여금 하늘에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2] 하늘의 순결함과 거룩함과 평화로움은 드디어 자기들에게 괴롭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영광은 사르는 불이 될 것이다.

[4] 그들은 그 거룩한 곳에서 도망하기를 갈망할 것이다.

[5] 그들은 자기들을 구속 하시려고 죽으신 그분의 얼굴에서 감추어지기 위하여 멸망을 환영할 것이다.

[6] 악인의 운명은 자기 자신들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고정된다.

[7] 저들이 하늘에 제외되는 것도 자기 스스로 자원함이며, 하나님 편에는 공의와 자비가 있으시다. 〔GC 543. 쟁하 367, 368참고〕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색케 한다면(덮어 가린다면) 구원얻기가 무시무시하게 어렵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헌신과 전심으로 바칠 동기부여가 시들어 버린다. 악으로 향하게 하는 시험이 호소해올 때 저항하기 어렵게 된다. 구세주께서는 “마른 땅에서나온줄기”가 되고, 그분의 복음에는 “우리가 흠모할만한 아무” 아름다운 것도 담겨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많은 교인들의 “그리스도인 경험”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분의 은혜의 순수한 (다른것이 섞이지 않은) 복음을 이해 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기로 하는 선택 까지라도 쉽게 된다고 죤스는 말한다. 그리고 확실히 구원받는데 있어서 이 선택 문제가 어쩌면 유일하게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관점으로 그것이 쉽게 된다 할지라도 확실히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실이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에 생각지도 않던 죄들을 가르쳐 주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깊은데로 내려 가셔서 마침내 밑바닥까지 내려 가시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 뿐이며 그분이 당신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불결하고 불순한 마지막 사건을 찾아 내셔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때에 우리가 “나는 죄보다 차라리 주님을 소유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행위는 완전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 그 성품 위에 찍힐 수 있습니다 〔회중: “아멘”]. 당신은 어떤 성품을 차라리 갖고자 하십니까? … [회중 가운데 어떤 이는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염려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이 얻은 것에 대하여 더 많은 사람이 주님께 감사한다면 오늘 저녁 이 집안에 더욱 많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즉 완전하신 충만함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전에 결코 알지 못하던 여러분의 죄들 중에 어떤 것들로 덮인, 어느 것을 차라리 갖기를 원하십니까? [회중 :”그분의 충만하심을 원하지요.”] 그러나 증언은 우리에게 죄의 오점들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 주위에 죄들이 있는데 어떻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 즉 우리 안에서 나타난 그분의 완전한 성품의 자국인, 그 인이 우리 위에 찍힐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분이 우리가 꿈에도 상상 못한 깊은 곳까지 파고 내려 가셔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며 악의 최후의 흔적까지 드러내실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그분으로 하여금

찾으시는 그 일을 계속 하시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주님 아니면 우리 자신, 주님의 의 아니면 우리의 죄, 주님의

길 아니면 우리의 길 어느 것을 우리가 소유할지에 대하여는 단순히 그대와 나의 살아 있는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것을 가질까요? [회중: “주님의 길이요”]. 우리가 주님께서 이루신 것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관계에 있

는지를 알때에 선택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선택이 쉽습니다. 양도(surrender)가 완전하게 되게 하십시오 (죤스, 대총회 회보1893, p. 404).

           와그너는 동의한다. 진리를 믿기 “어렵게” 하기 위하여는 사람은 진리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믿는다는 것이 성도의 자녀를 위하여 자연스럽듯이 불신자의 자녀를 위하여도 자연스럽다. 사람들이 자신들 주위에 자만의 장벽을 쌓아 올리는 때만 (시73: 6) 그들은 믿기가 어려움을 발견한다 (영문 시조 1896, 8, 6).

           이제 죤스로 하여금 그의 솔직하고 소박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가슴에 사무치도록 호소하게 하라.

           도대체 사람이 그가 죽은 것에 대하여 계속 살 수 있습니까? - 아니요. 그렇다면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었을 때에 그가 죄 안에서 살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알코올 중독에 의한 진전 섬망증이나 또는 장티푸스로 죽습니다. 그가 만일 자기의 처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게 된다면 알코올중독에 의한 진전 섬망증이나 장티푸스로 계속 살 수 있을까요? 그것(알코올)을 생각하는 바로 그 자체가 그에게 죽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알코올이) 그를 단번에 죽였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그러합니다. ···그는 자기가 그것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계속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큰 문제는 그들이 죄에 대하여 죽기까지 죄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어떤 특정한 죄는 싫어하겠지요. 그리고 그 죄를 끊기를 원하고 그 죄에 대하여는 “죽기를 원하” 며 그 죄를 버렸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맞지 않는 어떤 다른 특정한 죄, 즉 그들이 호감을 가질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짐작에도, 그 특정한 죄를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들도 떼어 버리려고 애쓰는 죄에 대하여 싫어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들은 죄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특정한 방법으로 나타나든지 저러한 특정한 방법으로 나타나든지에는 관계없이 그 죄 자체와, 생각(개념) 안에 있는 죄와, 추상적인 죄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를 향하여 죽은 만큼 죄 자체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죄에 대하여 ···충분히 싫어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죄 안에 살도록 할 수 없습니다(대총회 회보 1895년판 352페이지).

           그러면 무엇이 죄를 향하여 그렇게 죽게 할 능력을 공급하는가? 그렇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죤스는 계속한다.

           우리는 항상 죄를 향할 기회가 있습니다. 죄를 향할 기회는 우리에게 … 매일 매일 언제나 제시 됩니다. 그러나 기록되기를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죄에 대한 암시는 … 그분 안에서 나에게 죽음 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깜짝 놀란, 놀라는 질문 형태로 기록 되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는 줄을 알지 못하느뇨?”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 죄의 주관에서 구함 받은 사람은 죄의 고용살이에서도 구함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므로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삶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현재),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확실한 것처럼

나도 십자가에 못 박히며, 그가 죽으심이 확실한 것처럼 나도 그분과 함께 죽으며, 그분이 묻히신것 처럼 나도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가 일으키심 받은 것이 확실한 것처럼 나도 그분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나는 죄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shall not) (상동 p. 353).

           “그리스도의 복음 ···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 16) 우리가 차 안에서 발동을 건채 급강하하는 친근한 사실은 아마도 우리를 도와 구원 얻기가 얼마나 쉽고 잃어 버려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발동을 건채 급강하 하라. 그리고 엔진이 작동하지 않고 있을 때에 그것을 조종하기 위하여 시도하라. 핸들을 돌리기가 아주 어렵다. 만일 그것이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거대한 트럭들 중에 하나라면, 엔진이 조타 장치(핸들)에 힘을 공급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는 앞 바퀴를 돌리기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엔진이 작동하고 있다면 어린아이라도 그 핸들을 이리저리 돌릴 수 있다. 동력이 그것을 쉽게 한다.

           그러나 운전자인 그대는 그대가 가기를 원하는 길을 여전히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엔진은 그대의 선택 능력이나 선택할 그 책임을 결코 완화시켜 줄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자가용 차나 그대의 트럭안에 팔장끼고 앉아서 “나를 우체국까지 실어다 주라”고 말할 수 없다. 일단 그대가 오른편 아니면 왼편으로 선택하고 바퀴를 돌리기에 아주 적은 노력을 들인다 해도 즉시로 동력 장치는 그 일을 해주며 그 임무를 쉽게 해 나간다.

           구원 받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종은 어떤 도움이 되는 권면을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내 자신을 바칠까?” 하고 묻는다. 그대들은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나 도덕적인 힘이 약해서 유혹의 종이 되고 죄악적 생애의 습관에 지배를 받고 있다. 그대들의 약속과 결심은 썩은 새끼와 같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생각이나 동기와 애정을 억제할 수 없다. 그대들이 약속을 어긴 것과 맹세한 것을 이행치 못해온 사실을 깨달을 때에 그것이 그대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그대들의 신임을 약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다. 그대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의지의 참된 힘이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 안에서 다스리는 힘(지배력)이 되며, 결정력이나 혹은 선택하는 힘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그대 자신으로는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대는 그대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나니 그리하면 그분은 그대들 안에서 그대들이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온 성질은 그리스도의 신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대들의 애정은 그에게 중심을 두게 되고 그대들의 사상은 그와 조화될 것이다 (Sc 47, 정로의 계단, 영한대역 111, 113 참고).

           이것이 죄인은 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단순히 수동적이면 된다는 거짓 이설인 신의 의지로 말미암아 교묘하게 다루어지는 (접착제로 된 하나의 유리 그릇) 단순한 정적주의의 좋은 소식인가? 어떤 이들은 피상적으로 이 장의 기별과 상반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바로 이해될 때에는 상반되지않는 말씀을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성품을 얻는 일이 쉬운 일이라는 보증은 주시지 않으셨다. 고상하고 모든 면으로 원만한 성품은 선천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히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고상한 성품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통한 개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재능과 정신력을 주시고 우리는 성품을 형성한다. 고상한 성품은 자신과 더불어 어렵고도 고된 싸움으로써 형성된다. 유전된 경향들을 대항하여 연달아 투쟁하는 값이 지불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면밀히 비판하고 호감적이 되지 못하는 성벽은 하나라도 고치지 않은 채로 남겨 두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COL 331, 그리스도의 실물교훈 339 참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좋은 소식을 무효로 하는가? 이것이 그분이 말씀하신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니라”는 말씀과 상반되는가? 엘렌 화잇의 기록중에 1888년 기별의 좋은 소식의 면모를 반대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이 인용하는 말씀들이 있다.*

*“이러한 말씀들 중에 어떤 것들은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124-128, 선지자와 왕 76,(MYP 99-104, PK 84), 교회증언 2권 445, 4권 286. 그러나 주의 깊은 연구는 그곳에 아무 충돌이 없음을 드러낸다. “곧고 협착한 길”은 반드시 어려운 것은 아니다.-그것은 좁다는 뜻인데, 우리가 세속적인 이기심의 짐 보따리를 가지고 갈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참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싸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계속 “힘써야” 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적으로 살고자 한다면 쉬지 말고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가?” 우리가 살기를 기대하는 한, 아마도 매일 몇 끼씩 먹어야 한다-그것이 “어려운가?” 건강한 사람은 숨쉬며 그리스도인이 모든 신경을 늘리는 것처럼 모든 근육을 늘리며 먹고, 더욱이 둔하게 되거나 활발치 못하게 되기 보다는 즐겁게 되기 위하여 항상 운동과 활동을 찾는다.

           우리는 참으로 어렵고도 고된 자아와의 싸움과 끝없는 투쟁들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의 요점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에서 떠나서는 우리 자신의 개인의 노력은 쓸데 없다는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가 절대로 시야에서 사라져서는 안된다. 십자가가

사실은 우리의 몫을 쉽게 한다.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상에서 그분의 짐이 가벼웠는가? 아니다.

           겟세마네와 십자가 상에서 그분 자신의 어렵고도 고된 자아 투쟁이 너무나도 심하여 그분은 피방울의 땀을 흘리셨다. 그렇다 그분의 바로 그 심장까지 최후의 고민으로 파열 되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나의 짐은 가볍다”고 그분이 말씀 하였을 때에 우리에게 거짓말하고 계셨는가?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무섭게 어려운 고민을 모두 다 당하셨다. 마태복음 11: 30절에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그 짐은 단순히 우리가 운반할 짐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우리가 그 짐을 운반하기에 가볍게 한다. 왜냐하면 그 짐이 그분에게 무거웠음을 우리가 이해하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단 하나의 어려운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선택이다. 우리가 홀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부름 받지 않는다-오직 그분과 함께(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부름 받는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백만 배나 더 쉬운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그러면 그 짐은 참으로 쉽게 된다.

                     놀라운 십자가 그 광경 바라볼 때

                           영광의 왕자가 거기서 죽으셨네

                  최대의 나의 이득 손해로 여기며

                           내 모든 자랑에는 멸시를 쏟으리

           비록 이것이 여전히 어려워 보일지라도 잃어 버려지기 위하여 그러한 사랑을 거슬려 계속 싸운다는 것과 계속 성령의 끈기 있는 봉사를 격퇴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지어다!

Family Sites

통합 사이트sos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