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라는 말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Posted in 완전 문제와 승리

완전하라는 말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저자:  데니스 프리비 (전 PUC 신학과 교수, 현 Amazing Facts 의 전도목사)

완전이란 낱말은 오늘날 교회에서 문제를 야기시키는 단어가 된것 같다. 정말 완전이란 무엇일까?
먼저 우리가 언급해야 할 것은 완전이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최종 결과라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방법도 아니요 그 기초도 아니다. 그것은 칭의와 성화의 과정의 결론인 것이다.

자, 이제 완전이란 단어부터 분석해 보기로 하자. 적어도 이 문제에 관계된 완전에 대한 네가지의 정의들이 있다.

첫 번째는, 절대완전이다. 때때로 우리 인간들은 결코 절대적인 완전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은 옳다. 왜냐하면 절대완전, 즉 한계도 없고 미래에 실패할 가능성도 없는 완전은 하나님 자신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절대완전이란 피조물들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요, 인간들을 위한 것도 천사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천사들의 완전은 하늘에서 실패하였고 사람들의 완전함은 에덴에서 실패하였다" (Our High Calling, 45).

루스벨이 처음에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시다고 비난했을 때에 거의 반수의 천사들의 무리가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옳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Story of Redemption, 18).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 되심에 대한 진리를 제시하심으로 루스벨의 도전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셨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24).

그 회의 이후에 하늘의 천사들의 약 1/3이 루스벨의 편에 가담하였고 하늘로 부터 쫓겨났다 (3T, 115). 이것은 루스벨의 말을 듣고 그가 옳다고 생각했던 천사들 가운데 많은 수가 그들의 마음을 바꾸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루스벨 앞에서 자기들의 마음을 바꾼 이러한 천사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절대완전의 단어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천사들은 십자가가 있을 때 까지 하나님이 옳았는지 사단이 옳았는지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었다. 십자가 이후에야 사단이 비로서 완전히 그들의 동정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시대의 소망 3권, 295~300). 그렇다면 절대완전이란 천사들에게 까지도 적용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것으로 볼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논의 할때에 절대완전은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지사인 것이다.

두 번째 완전에 대한 정의는 본성적인 완전이다. 우리의 죄된 본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만 제거될 것이요, 그 후에야 속으로 부터 나오는 죄된 충동들이 없게 될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속으로 부터의 유혹이 제거되는 일이 포함된 본성적 완전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전에 본성적 완전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와 죄없는 상태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의 정의를 성품에 초점을 맞추면, 오늘날 우리가 완전에 대한 정의를 논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완전 혹은 완전함에 대한 낱말을 묘사할 때에 적어도 두가지 성픔에 대한 견해가 있다.

첫째는 굴복된 성품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할 때, 개심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완전은 그 당시에 완성된 것이지마는 그러나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하는 그 정도까지만 완전히 굴복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그 당시에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굴복된 성품은 완전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하다고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가 꼭 살펴보아야 할 또 하나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장성한 성품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선택 여하에 달린 것으로 볼때에 우리는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역시 믿어야 한다. 장성한 성품은 단적으로 말해 개인의 생애의 추수할 무르익은 상태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더 이상 죄 짓지 않기로 선택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반역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그러한 선택은 어느때나 일어날 수 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안에 살아 계신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시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범죄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짓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범죄할 때에는 사단의 지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은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 오시면 죄가 나가고, 죄가 들어오면 그리스도께서 나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죄가 동시에 우리의 생애의 보좌에 같이 앉아 우리를 다스리도록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지 않으신다. 장성한 완전의 상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주장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적인 선택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곧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기로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시간동안 타락한 인간의 불가능들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의 가능성들에 대하여는 말 할 수 없단 말인가?

우리가 다룬 정의들에 있어서 우리의 연구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정의들은, 우리가 우리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면을 다루는 범주들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선택에 의한 것으로 믿는다면 순종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또한 믿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굴복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위한 능력을 제공하시기 때문에 굴복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없는 성품이 가능한 것이다. 이리하여 주의 깊게 정의 내려진 완전함이란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새로 거듭남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가져 오는데 그것은 언제나 구원을 위하여 충분한 것이다. 우리는 그 굴복에 근거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굴복을 중단 하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굴복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굴복을 중단하는 그 일을 그쳐야 하며 또 그칠 수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언제나 완전히 주장하시게 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관건은 우리의 굴복의 지속성인 것이다. 그리스도이 능력은 꾸준하지만 우리의 관계가 때때로 약화되는 것이다.

본성적으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항상 죄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어떠한 선택도 취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된 본성속에 죄없는 성품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알게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인의 본성의 충동들을 성령의 주관하심으로 승리하셨다면 그와 똑같은 방법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그 방법이 분명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죄책감이 란 우리의 본성때문에 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여 다져온 성격 때문인 것을 상기하는 일이 중요하다.
유다서 24절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중대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능히 너희를 거침이 없게 하시고(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keep you from falling) 너희로 그 영광앞에 흠이 없게 하시리라. "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시기에 능하신 분인가? 유다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넘어지는 것이 우리 생애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시다. 빌립보서 4:13절은 우리가 주의깊이 살펴보아야할 또 다른 성경절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가능한가? 죄를 이기는 승리가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베드로 후서 2:9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그렇다면 우리가 시험에 굴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시험에서 건지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시험에서 건질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 고린도 전서 10:13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쓰러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강한 시험이 우리에게 이르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모든 시험마다 피할 길이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죄짓는 것이 필연적일 정도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험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하기만 하면 모든 시험을 이기는 길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베드로 전서 2:21,22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없는 생애를 사셨다는 것을 알지마는 때때로 주님이 또한 우리의 모본되신 것과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요구하신다는 사실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태어나시고, 우리의 질고를 느끼시고, 우리의 욕망들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는 말이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그분께 사실이었다면, 그러면서도 범죄치 않으셨다면 그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모본이 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계시록 3:21에서 또 놀라운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힘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승리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분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겨야 한다. 분명코 우리는 주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지마는 우리가 주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여전한 것이다.
또 하나의 훌륭한 말씀이 고린도 전서 10:5에 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상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각들을 주께 가져와서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들과 태도들을 주과하시게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 5:16은 말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만일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거듭 넘어지고 거듭 실패할 필요가 없다. 성경의 약속은 우리가 이길 수 있고, 육체와 싸우는 전쟁에서 계속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기대하듯이 화잇 여사께서도 장성힌 분량으로 자라가는 문제를 다루면서 분명하고도 능력있게 말씀하고 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재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은 그의 백성의 품성의 완전함에 포함되어 있다. "(시대의 소망 3권, 164)

우리는 이제 완전함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아주 중요한 한가지 원칙에 까지 왔다. 왜 완전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가?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입증하는가?

"그리스도의 명예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성품을 완전케 하는 일에서 온전히 세워져야 한다. "(영문시조, 1897년 11월 25일자)
"만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속적으로 증가되는 빛이 필요한 백성이 있었다면 바로 지금 이 위기의 시간을 살고있는 백성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율법을 보유하도록, 그리고 온 세상 앞에서 당신의 성품을 옹호하기 위해서 부르신 바로 그 백성들이다. "(5T, 746)
"어떻게 이 세상이 빛을 받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생애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을까?...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신의 영광의 밝은 빛을 세상에 반사해야 한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해지기를 기대하신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또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심으로 우리가 거룩한 품성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한 준비를 마련하셨다. "(R & H, 1904년 1월 26일)

품성의 완전의 목적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 우리가 성품을 굴복하므로 칭의를 얻었을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완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빙성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은 합리적인 것이요,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은 이러한 주장에 반기를 들고 나왔고, 아직 그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빙성을 변호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필요한 거룩한 능력을 주심으로 당신의 이름을 스스로 변호하실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마한 완전한 품성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의 마지막 종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질문은 '어느 누가 성품의 완전함을 이루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완전한가? 화잇 선지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이 예언자 에녹의 경건한 성품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 땅으로부터 구속함을 받게 될 자들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거룩한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100)

화잇 부인은 에녹이 부도덕한 공해가 가득찼던 때에 살았어야 했으면서도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하늘에 관한 사물들 위에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예수의 얼굴에 있었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가 호흡하는 분위기는 죄와 부패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는 그 당시에 관영하는 죄로 인해 더럽혀 지지 않았다. (2T, 122 페이지를 보십시오.)

확실하게 에녹은 죄짖지 않기로 선택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이 세상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악한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조화되는 생애를 살기로 선택하였다. "아담 때로부터 모든 세대마다 마귀의 모든 술책들을 저항하고, 인간이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고귀한 대표자들로 굳세게 선 소수의 사람들이 늘 있었다...에녹과 엘리아는 그들이 선택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간이 어떠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바른 대표자들이다. 사단은 이 고귀하고 거룩한 두 사람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도덕한 공해 중에서도 깨끗하게 섰고, 그들이 의로운 성품을 완전히 형성하였으며, 하늘로 승천하기에 합당한 자들로 인정받은 것을 인하여 몹시 동요되었다. 그들이 고귀한 강직함으로 도덕적인 능력가운데 굳게 섰고, 사단의 모든 유혹들을 승리했을 때에 사단은 그들을 죽음의 권세 아래로 끌어 내릴 수 없었다. 사단은 자기의 유혹들로 모세를 이긴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모세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죄를 범하도록 인도하여 그의 표상적인 성품에 흠을 가져온것에 대하여 쾌거를 부른 적이 있었다. (RH, 1874, 3월 3일)

분명히 에녹과 엘리아는 그들이 승천하기 전에 그들이 형성한 품성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저항하기로 선택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아름다운 문구를 실물교훈, 340 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에녹과 같은 자들이 있다. " 그렇다면 이러한 성품의 완전함을 이룬 자들이 오늘날 존재하는가? 그 대답은 분명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은혜의 시기의 마침이 있고, 하나님께서 그 후에 어떠한 특별한 일을 전시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을진대, 우리는 또한 죄악적인 욕구에 굴복하지 않는 생애를 뜻하는 완전한 품성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은혜의 시기가 끝마친 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그들의 희생들과 고백들과 기도들을 올릴 제사장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초기 문집, 49)
"또한 나는 많은 사람들이 환란의 때에 성소에 대제사장이 계시지 않은 채로도 주의 안전에서 살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맞고 환란의 때에 보호 받을 자들은 예수의 형상을 충만하게 반사하여야 한다...그러나 그때에는 그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입장을 간 구해 줄 중재자도 없을 것이다. "(초기문집, 74)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이 그치게 될 때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앞에서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저들의 옷은 흠이 없어야 하고 저들의 품성은 피뿌림을 통하여 죄에서 깨끗해 졌어야 한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저들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악과의 투쟁에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대쟁투 하권, 192)

은혜의 시기가 마친 후에는 하늘에 변화가 있을 것인데,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 사업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아버지 앞에 죄인들의 사정을 호소하는 중보자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힘주시는 능력이 지구에 사는 백성들 속에 거하시는 일이 제거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의 시기의 마침 후에는 죄를 용서하는 제사장의 봉사가 끝마친 것이다.

"이처럼 두려운 시기에 의인들은 중보자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대쟁투 하권, 478)

"예수의 중보사업이 마친 후에 성도들은 중보자 없이 거룩한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살게 될 것이다. "(살아남는 이들, 403 영문)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이 마친다고 하는 뜻은 은혜의 시기가 마친 후에 더 이상 죄의 용서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죄를 용서하는 일이 그친다면 은혜의 시기가 마친 후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계실 때에만 용서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중보자가 없는 그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짧은 기간에 지체되는 근본적 이유는, 그들의 의지가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뜻과 연합된 자들을 지켜보고 있는 우주앞에, 그들의 생애속에서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의 실재를 극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단과 동의함으로 거룩한 신뢰를 배반했던 자들이 최종적으로 사실상 죄에 대한 핑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다. 은혜의 시기의 마침은 하나님께서 우주앞에 나타내시는 최종적인 전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승리하는 일과 은혜의 시기의 마침과 14만 4천의 도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역시 죄없이 사는 진리에 대해서도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을 토의 할때에는 그 목표 즉, 그 마지막 결론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초점을 칭의와 성화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을 받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과 승리를 가지고 우리 생애로 들어 오신다. 달리는 주자가 경주의 끝에 있는 골인 라인을 생각하면서 바로 앞에 있는 몇 야드를 뛰는데 중점을 두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경주의 끝에 있는 목표를 생각하면서 오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도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세상의 질고를 지신 것은 우리들에게 우리도 죄없는 생활을 살 수 있고 우리의 말들과 행동들과 영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생애에 이러한 능력을 나타낸다면 우리도 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 (Upward Look, 303)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이기는 승리를 줄 수 있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 때문에 성경적 완전함의 가르침은 결코 낙심케 하는 주제가 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배성앞에 놓여진 가장 영광스러운 소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형제들이여, 진실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붙드실 수 있으시기에 능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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