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의 전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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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전원생활

W. D 후레이지

오늘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에녹에 대하여 연구하고 합니다.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 간 사람입니다. 현재 두 사람이 살아서 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받았는데 그들은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이 외에 앞으로 그런 경험을 할 사람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144,000인이 이 특권을 누릴 것입니다. 친구여,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두 사람에게만 일어난 일이 수천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려고 합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가 지금 우리 주변에 있습니까? 우리는 주의 사자가 언급한 심금을 울리는 호소를 기억합니다. “144,000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힘을 다하여 노력하자”(7BC, 970).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에녹의 생애와 경험을 연구할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에녹에 대해서 많은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과 경험에 대한 묘사를 보고 이를 우리에게 적용시키기에는 충분합니다. 히브리서 11: 5절을 보십시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시므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그가 승천하기 전에 바로 이 세상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그가 이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우리도 틀림없이 에녹의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사역자, 51 쪽에는 위의 성경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교제를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에녹의 품성이 거룩하였던 것처럼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품성도 거룩하여야 한다. “ 여러분은 에녹과 같은 경험을 하겠습니까? 그대가 버림받지 않는 한, 또는 그대가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죽지 않는 한 이 경험을 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버림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가 확신하는 바로는 우리가 승천의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승천을 우리의 목표와 희망과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에는 이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 유의해 보십시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65t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 22-24)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있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를 찾으러 여기 저기 뒤졌으나 그를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그는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에녹은 사라졌습니다.

그는 어디에 갔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에녹과 하나님은 함께 산보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둘은 아주 멀리 걸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에녹의 집에서 아주 멀리 떠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녹아 내가 사는 집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나와 함께 집에 가자.” 얼마나 훌륭한 산보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이런 산보를 우리도 하고 싶습니다.

복음사역자, 49쪽을 보십시다. “에녹은 환상이나 계시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고 일상 생애의 그의 모든 일을 행하는 가운데 동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도 그에게 할 일이 있었으므로 그는 결코 속세를 피하여 은둔 생활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기독교의 초기에 배교의 물결이 들어 온 뒤, 거룩하게 되려면 은둔생활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딘가 동굴에 살면서 독서와 기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생활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은둔자가 아니었습니다. “가정에서나 혹은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서 그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또는 친구나 시민으로서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었다. “ 이와 같이 에녹은 일하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 방법입니다.

에녹이 설교자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에녹이 설교하는 모습이 유다서 1: 14,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담의 7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에녹의 설교에 나타난 대 주제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는 “재림 전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의 시선은 다가 올 큰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영광의 천사들을 모드 거느리고 성도들에게 보상을 주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사건입니다. 에녹이 그대와 내가 연구할 표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에녹이 전했던 것과 똑 같은 기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유다서의 기록에서 에녹 시대의 상태에 대하여 짐작이 가십니까? 그것은 경건치 않은 세계였습니다. 실로 그대가 만일 에녹의 시대가 얼마나 사악했는가를 보려면 창세기 6: 5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홍수가 이 세상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다시 한 번 멸하시려고 하십니다. 이제는 물의 범람이 아니라 불의 범람이 될 것입니다. 이 파멸에서 건져냄을 받을 자가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노아가 보존된 것과 같이 의인들이 이 세계에서 구조되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녹의 기별이 당시에서와 같이 오늘날에도 어울립니다.

에녹에 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지만 세상과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있었지만 세상과 짝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모스 3: 3에는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서울에 가겠다고 하고 저는 부산에 가겠다고 하면 우리는 함께 여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해야 함에 틀림없습니다. 함께 동행하려면 뜻이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에녹이 하나님과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말한다.”(5T, 743) 만일 그대가 하나님과 일치한다면 그대는 거룩한 생애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과 뜻이 같지 않다면 그대는 거룩함이 없는 것이지요. 황홀감이 얼마나 있든지, 사람들이 얼마나 소리지르고 노래하고 기도하는지 상관없이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전히 거룩함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실천했던 거룩한 생애, 그리고 그러한 생애를 시작하며 유지하기 위하여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하여 연구하기 전에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그의 율법을 주셨으며 그들은 그것을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산에서 쫓겨나 힘겨운 노동을 통하여 참된 회개와 순종의 교훈들을 배우도록 이 세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아름다운 동산에서 끌어내시어 죄의 저주를 받은 세계로 추방시키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아, 친구여 생각해 보십시오. 땀과 고생, 가시와 질려, 이런 것들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에덴에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먼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과서의 한 부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들을 두었음을 기억하시지요. 아벨은 의인이었고 가인도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같이 그의 자신의 견해를 가졌습니다. 가인은 아벨이 용납되고 그는 외면당하였을 때 화가 치밀어 일어나 아벨을 쳐 죽었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에덴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해 버렸습니다. 그는 세계의 다른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창 4: 17). 여기에 성경에서는 처음으로 성(City:도시)”이란 용어가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아벨 대신에 또 다른 아들을 주셨습니다. 셋이 자라나 아벨과 같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함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은 진리를 간직하는 영광스런 특권을 누렸습니다.

인류의 두 무리의 선두로서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셋이 서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대가 흥미 있는 일을 주목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가인이 저주를 받고는 그 아버지의 가족을 떠나갔다. 그는 먼저 땅을 경작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고, 다음에는 한 도시를 건설하여 그의 장자의 이름을 따서 도성의 이름을 삼았다. 그는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죄로 저주받은 세상에서 자기의 소유와 즐거움을 가지려고 그는 이 세상의 신을 숭배하는 많은 무리의 선두에 섰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88)

가인이 도시를 발전시키고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이 각양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아벨은 천막에나 오두막에 살면서 양치는 생활을 하였으며 셋의 후손들도 그와 같은 길을 따라서 스스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하였으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 13, 16)고 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89) 아벨은 집에서 살았습니까? “천막과 오두막”이라고 하였지요. 오두막이란 무엇입니까? 풀과 나무로 지어진 보잘것없는 지붕 정도만 있고 벽도 없는 그런 것이겠지요. 그것은 그들이 에덴에서 살았던 같은 종류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에덴 집은 전부 다 살아있는 덩굴과 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아벨의 집도 일부는 그랬을 것입니다. 가인은 그의 도시계획을 진행시켜 나갔으며 인간의 업적이 계속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셋은 양치는 생활, 시골 생활을 하였습니다.

“얼마 동안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서 살았다. 가인의 씨족은 저들의 최초의 정착지에서 퍼져 나와 셋 자손들이 사는 평원과 골짜기까지 미치니”(상동, 89) 오, 어떠한 모습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집니까? 처음에 그들은 (셋의 자손들) 사악, 우상숭배, 신성모독, 일부다처, 간음 그리고 음행 등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말하기를 “오, 우리 자녀들을 이곳에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하며 “저들의 악화시키는 감화에서 피하려고 산지로 들어가 그곳에 살았다. 이와 같이 서로 떨어져 사는 한 저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순결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들은 점차로 골짜기의 주민들과 섞이기 시작하였다.”(상동, 89)

당시 그들은 라디오나 TV를 갖지 않았지요. 지금은 여러분이 산지에 있을지라도 하려고만 하면 가인의 모든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그런 영향들을 피할 수 있었던 자들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은 지금도 우리가 하려고만 한다면 그런 나쁜 영향들은 모두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저들은 점차로 골짜기의 주민들과 섞이기 시작하였다. 이 교제는 아주 나쁜 교제를 초래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창 6: 2) 았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중에 저들의 앞에 끊임없이 오는 유혹으로 죄에 빠지는 자가 많았고 저들은 독특하고 거룩한 성격을 잃어버렸다. 타락한 자들과 섞임으로 저들은 정신과 행동에 있어서 저들과 같이 되었다… 셋 자손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유1: 11) 세속적 번영과 향락에 저희 마음을 기울이고 주의 계명을 등한히 하였다”(상동, 89,90) 친구여, 느낌이 어떠한가요? 그들은 가인의 자손들이 누리는 모든 것들을 자기들도 갖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런 생각을 계속 품는다면 “가인의 자손”과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변질되어 타락할 것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금씩 조금씩 많은 사람들이 그 두려운 영향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이 무서운 배교가 한창 심할 때 에녹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고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는 셋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가증한 것들, 우상숭배의 관습과 영향에서 피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나는 참을 수 없소, 나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피해야 하겠소. 나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요. 하나님은 이런 일 가운데 계시지 않소.”

예언의 신의 말씀을 보기로 합시다. “그(에녹)는 악인들이 사는 곳에 그의 거처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소돔을 구원하려는 생각으로 소돔으로 살지 않았다.”(1 SDABC, 1087) 아, 친구들이시여, 이것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당신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결국 당신이 도시에 살지 않고서야 어떻게 도시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에녹도 아마 이와 같은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입김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돔을 구하려는 생각으로 소돔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럼 에녹은 전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그는 홍수 전 시대에 활약했던 가장 위대한 전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꼭 이치에 맞지 않는 말 같은데요?” 친구여, 이것은 꼭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치에 맞는 일을 지시하셨습니다. 저는 세상과의 분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그의 가족을 할 수 있는 대로 순결한 분위기 가운데 두었다”(상동). 저에게는 그러한 “순결한 분위기”를 에녹이 필요했던 것 이상으로 필요로 합니다. 저는 에녹과 같은 강한 정신이나 마음 그리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에녹이 세상과 세상의 악행으로부터 떠나 있는 일이 필요하였다면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의 영혼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저는 승천을 위해 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준비란 어느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설교단에서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앞에 나가 “예,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받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일을 착수하는 것입니다. 저는 부흥이나 설교단에서의 초청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구원받는다는 것도 믿습니다. 친구들이시여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일도 꼭 필요합니다. 다음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 보십시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남녀가 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몸부림치고 있는가? 우리는 그의 충만함을 구하여 우리 앞에 세워놓은 그 목표-그리스도의 품성의 완전을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는가? 주님의 백성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때 그들은 그들의 이마에 인침을 받게 될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될 것이요 기록하는 천사는 ‘다 이루었다’라고 외칠 것이다.”(RH, 1902년 6월 6일) 그것이 바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기울 자들이 소유해야 할 체험입니다.

때때로 저는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모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만일 시골에 들어간다면 우리 중에 누군가는 최전선에 남아서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 영혼구원의 실제문제를 해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친구들이시여, 우리가 에녹의 전도 법에 대해서도 연구하겠습니다만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쓰다가 자신들의 영혼을 잃게 되는 그런 일에 어떤 사람도, 어떤 가족도 부르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에녹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하튼 에녹은 왜 산으로 들어갔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죄인들에게 분리되기 위하여 그곳에 갔습니다만 그것은 모든 일의 절반뿐입니다. 다른 반은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그곳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어떤 것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얻기 위하여 산으로 갔습니다. 그의 목적으로 경건치 못한 감화를 피하는 것으로 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악행이 증가하는 것을 슬퍼하고 저들의 불신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존경을 감소시키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에녹은 저들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피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한적한 곳에서 보내며 묵상과 기도에 전심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주의 뜻을 실행하려고 그것을 더 분명히 알고자 주의 앞에서 기다렸다. 그에게는 기도가 영혼의 호흡 같았으며 그는 바로 하늘 분위기 가운데서 살았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95)

오, 친구들이시여, 그가 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걷고 있습니까? 실제적으로 걷고 있습니까? 그가 도보로 계곡으로부터 산으로 들어갔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기차나 자동차 그리고 비행 같은 교통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는 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저도 그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홍수 전 시대의 사악함이 여전히 감돌고 있는 이 시대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저를 분리시켜 주는 그런 거룩한 산보를 하고 싶습니다.

이제 두 번째 문제로 에녹의 전도 법을 연구해 봅시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에녹은 은둔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산에 들어갔지만 그가 언제나 산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대가 도시를 떠나지 않고 눌러앉아 있다면 죄의 계곡 – 죄악의 도시의 소용돌이 속에 그 더러운 웅덩이 속에 그대의 영혼이 휘말려 버리고 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대가 산으로 옮겼다 하더라도 은둔자가 되어 버린다면 그대의 구원문제는 역시 암담해 집니다. 단절된 생애가 계속된다면 몹시 고독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이 구원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은둔자가 되도록 도시에서 나오라고 부르시는 일은 전혀 없으십니다.

에녹은 의를 전파하는 설교자였습니다. 시골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경험을 쌓고 그리고 그는 산을 내려와 도시에 들어가서 사악한 세상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전파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간원하였습니다. 그는 산에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능력을 받았으며 그 능력을 사람들이 번영과 사치와 악덕에 묻혀 살고 있던 골짜기의 도시에 가져왔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나팔과 같은 소리로 우렁차게 외쳤습니다. 그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에녹이 다음 어떤 일을 했는지 아십니까?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에녹은 악인들이 사는 곳에 그의 거처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소돔을 구원하려는 생각으로 소돔에 살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그의 가족을 할 수 있는 대로 순결한 부위기 가운데 두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을 가지고 세상의 주민들에게 나아갔다. 도시를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그에게 아픔을 주었다. 그는 문둥병과 같은 죄를 보고 깊이 느꼈다. 기별을 전파한 후에 그는 언제가 경고를 받아들인 몇 사람들을 그의 거처로 데려갔다.“ (1 SDABC, 1087) 오, 친구들이시여, 저는 그런 모습을 보고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이것이 영혼구원입니다!”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여기에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별을 전한 뒤에 언제나 경고를 받아들인 몇 사람을 그의 거처로 데려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는 누군가를 데려가고자 하는 생각을 하였지요. 형제자매들이시여,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의 할 일은 단순히 경고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누군가를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를 강권하여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승리자가 되었으며 홍수가 임하기 전에 죽었다.” 그들은 에녹처럼 하늘로 옮기움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노아처럼 홍수가 범람하는 동안 방주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에녹을 보십시오. 전도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지금 집에 가까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마중 나와 있지요. 장남 므두셀라가 그것을 보고 말합니다. “야, 아버지가 오신다. 아버지가 또 몇 사람을 데리고 오신다.” 에녹의 아내와 자녀들이 준비된 상태에 있었습니까? 아니며 그들이 이렇게 투덜대는 모습이 연상됩니까? “아니, 아빠는 사람들을 집에 데려와 우리에게 일거리를 많아지게 합니다”하는 모습이요? 아니오, 결코 그런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빠의 사업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들의 일이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도록 도움이 필요 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가질 때 가정에는 죄의 도시에 가서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오히려 도시에 가는 것은 즐거움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명 때문에, 그것도 위험한 사명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불이 붙어 있는 집에 벽이 무너져 내리기 전에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건지러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벌써 두 번이나 잠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물 깊숙이 잠수하는 것과도 같겠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날 도시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위급함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에녹은 이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거기서 에녹과 같이 얼마 동안 지냅니다. 날마다 그들은 그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마시며 가정 예배에 참석하고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친구들이시여. 그 식생활이 그들이 도시에서 상용했던 것과 똑같았을까요? 아니면 달랐을까요? 물어 볼 필요가 없었겠지요. 각종 잡지들이 그들 곁에 구비되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육신의 음식이나 마음의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생명임을 발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었습니다. “에녹 선생님, 우리도 이런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에녹은 뿌듯한 심정으로 대답합니다. “그러면요. 할 수 있고말고요. 그것 때문에 제가 당신들을 이곳에 모시고 온걸요. “그리고 그들은 잘 견디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죽었을지라도 그들은 소망 속에 잠들었습니다. 그들은 장차 부활하여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에녹이 그들을 산에 있는 그의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죄의 부패한 영향 속에서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의로운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시여, 이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를 잘 견디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몇 시 또는 며칠 지낸 뒤에 그만 안절부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아, 나는 돌아 가고 싶다”라고 투덜댔습니다. 저는 그들의 변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에녹에게 몰려와서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에녹 선생님, 저는 당신이 저를 이곳에 데려와 준 것을 정말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시에 돌아가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에녹은 이런 변명의 내막을 알고 있습니다. 친구들이시여,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 평지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무엇을 원합니까? 그들은 담배가 그리웠습니다. 또 술을 마시고 스릴 있는 어떤 것을 바랬습니다. 경마나 운동경기, 소설탐독, 호색과 간음, 당시의 세상을 채우고 있었던 이런 것들을 그들은 탐하였습니다. 에녹이 살고 있는 곳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들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 11).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자극이 되어 더 큰 열심과 사랑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친구들이시여. 기억하십시오. 어떤 이들은 애써 노력할 것입니다. 가장 희망 없이 보이고 가장 부패하게 보이는 자들일지라도 우리가 만일 그들을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와주기 원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성소에 계시는 예수님, 그리고 천연계의 사물들 가운데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친구들이시여, 저는 오늘밤 제가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는 모든 말씀들을 다 읽을 필요가 없음을 인하여 기뻐합니다. 단순히 바라는 것은 거기 우리가 이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는 성경의 기별이 성취되는 날입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있는 글 몇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으로서 도시를 떠나야 한다. 우리는 에녹이 한 것처럼 도시 안에서 일하되 그 안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진리는 선포되어야 한다. 도시들은 유혹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런 오염에서 우리 청소년들을 가급적 멀리 피하게 하는 방법으로 사업을 계획해야 한다”(복음전도, 80,79). 우리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런 도시의 광경을 보고 도시의 소리를 듣도록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런 영향이 그들에게 적으면 적을수록 더 좋을 것입니다.

“도시들은 외곽의 전초를 중심으로 일해야 한다”(상동, 79). 이것이 에녹의 전도방법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도시들을 경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상에 임할 일을 경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시 안에 살면서 할 것이 아니라 왕래하면서 할 것이다’고 말하였다”(상동, 79).
“우리는 도시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현명한 계획을 세워야 하며, 동시에 우리는 도시에 편만한 오염시키고 타락하게 하는 감화력으로부터 우리 자녀들과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상동, 79).

우리는 분명히 도시들 가운데 교회 건물이 있어야 하며 우리의 기관들은 도시 밖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거듭 반복하여 우리에게 지시를 주셨는데 우리는 전원 전도본부들(Outpost Centers)로부터 도시를 상대해서 일을 한다. 우리들은 이 도시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한 기념비로서 예배 드리는 집들을 세워야 한다”(가려뽑은 기별 2권, 457). 왜 그럴까요? 교회는 영혼구원의 중심지입니다. 그런 이유로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 서적들을 출판하는 기관과 병자를 치료하는 기관과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기관들은 도시 밖에 세우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청년들이 도시 생활의 유혹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상동).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이 일을 하기 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밤 제가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기를 바라는 공과입니다. 친구여, 죄와 죄인에게로부터 분리되어 시골로 들어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지요? 그리고 단순히 시골생활을 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지요? 시골에서 도시를 방문하면서 경고의 기별을 전해야 합니다. 그럼 다음으로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시에서 사람들을 권하여 데려오는 것입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구원받게 될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도 제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의 신의 말씀에 나타난바 도시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 그들을 도시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젼이 언제나 우리의 심중에 살아 있어서 목자가 그의 양을 바라보듯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보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대하16:9)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들이시여, 그대들은 어떤 종류의 가정에 그들을 데려오시겠습니까? 그대들에게는 누군가 데려 올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그곳은 어떤 장소입니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돌아오신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성령이 침례 요한에게 임하시고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36)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말씀하시되 “무엇을 구하느냐?”하시니 그들이 말하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와 보라’고 하셨습니다(요1:3, 7~39).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는 바로 그 시간부터 시작된 교제는 영원히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데려 올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마도 예수님의 전 소유는 강가 오두막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분은 훌륭한 주택을 가지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곳이면 어떤 집이나 상관없이 하나님과 가까이 교통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사람들을 데려올 어떤 집을 마련했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제일 중요한 핵심은 여러분들이 그들과 함께 어떠한 체험을 나누어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일 그런 체험이 없다면 하십시오. 에녹처럼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몇 년이란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받자마자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친구들이시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받아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부족합니다. 걱정하거나 고민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낙담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또한 열망이나 야심을 추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오직 이 한 일을 위하여 우리의 시간과 일생을 드리도록 합시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의 동전이 갖는 두 면은 이것입니다. 하늘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을 준비시키는 것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준비하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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