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기만으로 들어가는 경로

Posted in 구원의 길

자기 기만으로 들어가는 경로

성경에는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전서3: 18. 이 말씀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경고이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또는 어떤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기만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기만 하다면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거짓된 정보를 스스로 제공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자기 기만에 빠질 수 있는 방법이다.

 인간의 의지력은 상상력이나 기억력보다 강하다. 이 문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이지만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경우를 함께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어떤 잘못된 감정과 의도로 인해서 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말이나 일을 했다고 가정하자.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한 후에 우리는 그것을 계속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아,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또는 이렇게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후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음에는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지” 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당연하고 바람직한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여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가 했던 잘못한 말과 행동을 타당하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다듬어 나간다면 우리는 자기 기만의 늪을 찾아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기만적인 생각은 더욱 발전되어서 급기야는 마치 자신이 그러한 잘못된 말과 행동을 전혀 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되며, 우리 자신이 올바른 말과 행동을 했던 것으로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우리의 잘못된 말과 행동에 대한 회개는 진정하고 정직한 것이 되어야 하며, 아울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지도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지 후회를 하다가 자기 기만 가운데로 빠져드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잘못과 죄에 대한 자기 미화는 극히 위험천만한 것이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서 1:26.

자기 기만의 예증들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 지도자들과 모세의 지도권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던 고라, 다단, 및 아비람이 자신들이 꾸미고 있던 배도와 반역을 옳은 일로 믿고 확신했었던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신실함과 분별력에 대해서 확고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아마 우리 역시 그때의 상황에서 그들의 열렬한 지지자 또는 비겁한 침묵을 지키는 자들의 무리 속에 서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지식과 눈과 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계획한 유대 지도자들의 교묘한 정치적 술수와, 이스라엘 족장들을 선동해서 반란에 앞장섰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운동을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였을 것이다. 화잇 부인은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단은 저들에게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죽음에 처해야 된다고 속삭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자기 자신들의 기만이었다. 저들은 자신들을 민족의 구원을 도모한 애국자처럼 생각하였다” 시대의 소망, 2권, 360. 그것은 놀라운 자기 기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깊은 자기 기만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 대한 영감의 기록을 살펴보자. “저들이 넌지시 했던 말이 백성들에게 그토록 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자신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527. 저들은 모세를 죽이고 자신들이 그 지도권을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에도 불고하고, 자신들의 반란을 타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항상 모세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기만의 늪에 빠졌던 것이다.

어떻게 자기 기만이 시작되는가?

 자기 기만은 점차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질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기만의 위험 가운데서 살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메시야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그의 기적을 보고 가르침을 들었지만, 자기 기만의 위험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었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527참조) 그러나 그들 역시 자기 기만의 늪을 피해가는 일에 실패하였다.

 자기 기만은 매우 작은 어떤 일에서 시작된다. 마귀는 단번에 누구를 죽이라고 충동하지 않는다. 사단은 처음에 유대 지도자들로 하여금 즉시 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속삭이지 않았다. 또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게도 모세를 단번에 살해하도록 충동하지 않았다. 만일 사단이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였더라면 그들은 마귀의 그러한 충동을 거절하였을 것이다. 사단은 우리를 자기 기만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기 위해서, 사소하고 조그만 일로부터 그의 활동을 시작한다.

자기 기만의 발전 과정

  고라에게 있어서 자기 기만은 자기 연민(Self-pity, 자기 동정)이 동기가 되었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395에는, 고라가 레위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직분을 갖지 못했음에 대해서 질투와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기 연민(자기 동정)은 인간의 마음에 매우 유해한 감정이다. 자기 연민으로 시작된 감정은 결국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이르게 될 수 있다. 유대의 제사장들도 동일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듣지 못한 천사들의 노래를 무식하고 천한 목자들이 들었던 것에 대해서 몹시 싫어했다. 왜 천사들은 구세주의 탄생하심을 알리기 위해서 유대의 고명한 랍비들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유대의 지도자들과 랍비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는 느낌을 느꼈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점이 되었다.

 “흔히 그 과정은 점차적이며,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과 당신의 종을 통하여 혹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하여 사람에게 임한다. 그러나 한줄기의 빛이라도 무시하게 될 때에 영적 감각력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어서 두 번째에 나타나는 빛은 그만큼 분명하게 식별할 수 없다. 그리하여 암흑은 증가되고 마침내 영혼이 밤과 같이 어두워진다. 시대의 소망 2권 44

“시초에는 작은 한가지 유혹이 품어져 있다가 그것이 자극 받고 충동을 받을 때, 그 유혹의 힘은 점점 커져서 결국에는 저들의 마음이 사단의 지배를 받기에 까지 이르렀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527.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사단의 지배를 받기에 까지 이를 수 있다.

 작은 유혹이 마음에 싹틀 때에 그것이 어디로 이끌림을 받을지는 알 수 없다. 아주 작은 유혹으로 인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재 평가가 일어나게 된다. “실제로 일이 그런 식으로 되었지만, 이렇게 되었더라면 훨씬 낳았을 텐데!”와 같은 생각이 반복적으로 뇌리에서 되풀이 될 때, 사람은 그것이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출애굽한 결과로서 생긴 불유쾌한 경험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런대로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광야로 들어옴으로써 생긴 손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했던 어려움과 고난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이런 모든 것들이 모세의 잘못과 실책에 의해서 기인되었다고 결론짓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모세가 자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밀고 나간 결과로 인해서 자신들과 백성들이 광야에서 고생하고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설득하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 기만의 늪의 중심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고 행진하였다. 그때까지 모세는 자신의 최선을 다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와 목숨을 걸고 헌신하였다. 모세가 애굽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하기로 선택하였다는 사실을 그들 역시 분명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마음 속에 싹튼 작은 불만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변조하는 작업을 은밀히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세의 노력과 희생과 헌신을 생각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불만족과 불편함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세의 모든 봉사들이 전혀 무가치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작은 시험과 유혹이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잡음으로 인해서, 마음 속에서는 지금까지 있었던 사실에 대한 변조작업이 시작되며, 결국에는 변조된 그것이 마치 실제로 발생되었던 사실처럼 부각되게 된다. 그리하여 거짓을 사실로 믿으면서 자기 기만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할 텐데” 라는 마음 속의 의지와 소원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기억력보다 강력한 힘을 마음 속에서 발휘하게 된다. 우리의 잘못된 감정은 잘못된 의지와 소원을 생기게 하며, 이러한 잘못된 소원(의지)과 어떤 사실에 대한 기억이 마음 속에서 오랜 기간을 두고 서로 계속적으로 부딪치게 될 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소원과 의지는 결국 과거에 있었던 사실들을 변조하면서 자신이 추진하고자 하는 일을 옳고 타당한 것으로 합리화 하기에 이른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을 믿는 자기 기만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게 될 때, 그는 소위 병적인 거짓말쟁이가 되게 된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거짓을 말하게 되며, 자신의 생각이 타당하고 합리적임을 확신하면서 잘못된 일을 도모하게 된다.

 “사람들은 죄악의 방종으로 인하여 사단을 저들의 마음에 접근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저들은 악의 한 계단에서 또 다른 계단으로 나아간다. 빛에 대한 거절은 정신을 어둡게 하며, 마음을 완고하게 해서 죄의 다음 단계를 취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쉬워지고 더 밝은 빛을 거절하기 쉽게 되어 마침내 저들의 행악의 습관은 굳어진다. 죄는 저들에게 더 이상 죄악처럼 보여지지 않게 된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539

 우리 주위에 빛이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둠 속을 거닐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당신께서 우리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주신 모든 기회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을 느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를 거절했던 유대인과 모세를 대항하여 모반했던 백성들은 돌이킬 수 있었던 충분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진실과 그 당시의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주위에서 전개되는 매 상황의 분석을 위해서 필요되는 모든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계신다. 유혹을 계속적으로 마음에 품음으로써 감정적인 자기 연민(자기 동정)에 몰입되는 것과 가장 작은 죄라도 생애 가운데서 허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설득함으로써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 빠져들거나 한가지 작은 빛이라도 거절하거나 또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싹튼 가장 작은 의혹을 가족들과 형제들에게 퍼트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을 불러오게 된다.

시드기야의 배도와 자기 기만

  성경에 나타나 있는 인물들 중에서 자기 기만의 두드러진 예는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의 경우가 될 것이다. 시드기야는 환란 가운데서 진리를 고수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의 청년들-사드락,메삭,아벳느고-는 두라 평지에서 느브갓네살의 신상에 절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진리를 고수하였다. 여러 독자들은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금신상을 향하여 절을 하기로 되어 있던 그날, 그곳에는 히브리 청년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브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도 모든 관원이 느브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브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다니엘3:1-3.

그 당시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도로 지정하였으며, 시드기야를 그 도의 총독으로 삼았다. 물론 이스라엘 안에서는 시드기야가 왕으로 불렸지만, 그는 자신이 실질적인 왕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바벨론 왕인 느브갓네살의 금신상 낙성 예식에 부름을 받아 참석하였다. 그는 히브리 청년들과 함께 두라 평지에 그날 함께 있었다. 그날, 그곳에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던 시드기야 왕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는 그곳에 다른 이스라엘인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히브리의 세 청년이 우뚝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동안 자신도 그들과 함께 서있을까를 생각했지만 믿음과 용기를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시드기야는 이 수치스런 일에 대해서 장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또 후회하였을 것이다. 결국 금신상에 절을 한 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긴긴 시간 동안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연할 일을 하였다고 자신을 설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기만의 늪으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치스런 기억을 변조시키고 조금씩 미화하면서, 자신의 배도에 대해서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자신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되었으며, 오히려 히브리 세 청년을 상황에 따라 적응할 줄을 모르는 답답한 사람들로 평가하게 되었을 것이다.

점차적인 결정

  어떻게 우리들에게 이러한 자기 기만의 비극들이 생기게 될까? 우리들의 점차적인 결정들에 의해서 우리는 그러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아무도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리겠다고 즉각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적인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빛을 조금씩 거절하고 죄를 약간씩 감싸 안으면서 점차적으로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 말씀의 빛에 자신을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이 점차적인 결정의 위험성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죄인들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나들면서 사귀는 것이 별로 위험한 일이 아니라고 결정함으로써 점차적인 결정을 시작하게 된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잠언1: 10. 우리는 삼손과 솔로문의 경험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경험들과 바벨론의 딸들의 품 속을 그리워하는 현대 이스라엘의 슬픈 체험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이 충고를 기억해야 한다. 그늘이 항상 드리워져 있는 곳에 그대의 가정을 꾸미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원수와 그대의 일생을 연합시키지 말라.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결정 또한 점차적인 결정이 될 수 있다. “극장에 몇 번 간다고 해서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야, 텔레비전에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야, 가끔씩 춤추러 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이러한 점차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리는 속삭임들이 우리들을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인도하는 목소리들이다. 거룩한 봉사를 소원하기 보다는 물질을 추구하는 결정 즉,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자신을 섬기기로 하는 결정 또한 매우 위험한 길로 접어드는 결정이 될 것이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5: 10

 날마다의 생애에서 선교의 의무를 등한히 여기는 결정, 차일피일 미루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결정 역시 자신의 영혼을 죽음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면서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488. 진리와 기별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날마다의 생애에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점차적인 타협과 자기 기만의 늪을 찾아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

 말은 마음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 가를 보여준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러나 말은 성품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성품 자체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말은 그 사람이 어떠한 위인인가를 나타내준다. 동시에 말은 그 사람의 성품을 꼴 지워준다. 만일 우리가 사실이 아닌 것들을 반복해서 계속 말하게 될 때, 결국에 가서는 그것을 진짜 사실처럼 믿게 되며, 혼돈 가운데서 자기 기만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로 영향을 받는다. 때때로 사단의 자극을 받아 순간적인 충동 아래서 그들은 시기나 악한 억측의 말을 발하게 되며, 자신들이 진정으로 믿지 않는 바를 마치 진정으로 믿는 것처럼 표현한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사상에 반응을 일으킨다. 그들은 저희가 한 말에 스스로 속게 되며, 사단의 선동을 받아 말한 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일단 어떤 의견이나 결정을 발표한 후에 그들은 흔히 너무 교만하여 그것을 철회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옳은 것을 증명하려고 힘쓰다가 마침내 저희가 정당하다고 믿게 된다.” 시대의 소망, 2권45. 바로 이것이, 어떤 사람이 거짓을 계속해서 고집하게 될 때, 결국에는 어느 것이 거짓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가를 스스로가 혼동하게 되어서, 사실과는 상관이 없는 자신의 상상을 실제적인 진실로 믿게 되는 묘한 상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상황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 사람이 자기 기만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때,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기만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는 자기 기만 가운데서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게 된다.

 어떻게 우리가 자기 기만의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참된 습관과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이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위대한 경험을 소유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자기 기만의 위험성을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깊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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