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신신학

Posted in 신신학의 정체

신신학

저자:  편집실

시작하면서

    과연 누가 신신학의 정체를 있는 그대로 노출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신학은 사단이 자신 있게 내놓은 걸작품이기에 그러하다. 그것은 때에 따라서 사랑이라는 언어로서 분장을 하며, 죄를 조금씩 짓는 것은 영생에 그다지 큰 해가 되지 않는다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우리는 사단이 몰래 던져놓은 신신학의 정체를 조금 드러내는 우리의 시도가 형제들의 인간적인 감정과 자존심을 상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가 신신학에 대해서 항거하거나 반기를 드는 일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소원한다. 신신학에 의한 희생자들의 피가 그것을 가르치거나 경고하지 않은 자들의 어깨 위에 임하게 됨을 알고 있는 우리가 어찌 조용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작은 외침과 탄원이 교회에게 진정 유익한 충언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얼마 전에 현재 타 주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한 목사님이 인근에 있는 재림 교회를 방문하셔서 주말 부흥회를 가졌다. 우연한 기회에 그분의 설교가 담긴 테잎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 들었던 몇마디의 말씀은 아직도 내 마음과 기억 속에서 고통을 더해 가고 있다.

    “신학교에서 배운 책 가운데에 우리 교회에서 우리 교인이 쓴, 우리 신학자들이 쓴 책들은 별로 없습니다. 전부 다 다른 신학교의 신학자들이 쓴 책을 가지고 배워서 안식일 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안식일 교회의 정통입니다…. 이제는 완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단순하게 구원의 원리를 깨달으세요. 이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친구는 아무리 못나게 보여도 좋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비겁한 사나이는 자기 부인을 팔아먹고 자기 혼자 살려고 거짓말한 사나이도 하나님의 벗이라고 성경에는 쓰여 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글이 성경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완전한 사람이었다면 저는 아마 좀 시무룩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는 신이나요….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벗이라고 칭하셨거든요. 나도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계명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지키게 해주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못 지킵니다. 여인을 보고 한번도 음욕을 품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탐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계명을 모두 지키십니까? 못 지키면 천국에 가지 못하는데요? 여러분 이러한 것이 신앙입니까? 우리에게 멍에가 되고 짐이 되며 일어나서 걸을 수 없도록 우리에게 언제나 고달픈 생애를 주는 것이 신앙입니까?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까? 그래서 완전하게 지켰습니까? 우리는 지킬 수 없습니다.”

    오늘날 미국 내의 재림 교회에 편만해 있는 신신학의 물결과 파고가 날이 갈 수록 높아가고 있는 모습은 더 이상 우리에게 생소하고 낯설지 않게 되었다. 미국의 신신학이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넘어서 서로다른 민족과 국가에게로 흘러가는 동안 신신학의 유형과 겉모습이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신신학이 그들 각 민족이 가지고 있던 신앙과 정서와 사상에 접목되면서 미국의 신신학은 국가와 민족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띈 그들 고유의 신신학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국에는 한국식 신신학이 생성되었는데, 한국의 신신학은 대개 미국에서 신신학의 원조를 배운 후 그것을 가지고 들어간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전파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부터 시작되어서 현재 미국 내의 재림교회를 휩쓸고 있는 신신학과 새로운 교회 성장학(축제식 예배 방식, 안식일의 축제화, 정신 언어 심리학 등)을 접하게 된 많은 유학생들은 그러한 것들을 선진 미국의 재림교회가 갖고 있는 발전된 재림 신학으로 오해하여 신신학의 기반성과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한 채 그것을 열심히 배우고 연구한 후 고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교회는 그들을 교단과 대학의 중요한 자리에 등용시킴으로써 신신학은 효과적이고 자연스럽게 한국의 재림교회에 소개되고 파급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신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현상과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자신이 미국에서 신신학을 배웠고 현재 신신학을 매 안식일마다 설교하거나 학교에서 그것을 강의하고 있을 지라도 자신은 신신학에 물들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보수적인 정통 재림신앙을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신학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면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기루와 같은 것을 과장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말한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병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인정하고 의사에게 찾아가야 되는데, 지금 신신학으로 병들어 있는 이 환자는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부인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 환자가 이토록 자신을 알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이 개신교회로부터 유입되어 들어온 신신학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받아들인 이후 지금까지 상당 기간 동안을 자신이 믿는 것을 발전된 재림신학으로 정직하게 믿고 가르치며, 설교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옆에서“지금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신신학입니다” 라고 곧바른 충고를 해줘도 그들에게 있어서 그 말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째, 대개 신신학을 받아들일 때에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수적인 재림 신앙을 완전히 버리고 신신학의 첨단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경우는 그가지 많지 않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신신학 중에서 어떤 부분만을 선택하여 받아들에게 된다. 또한 그들이 일반 개신교들에서 성행하고 있는 신신학적인 가르침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종교 연합 운동에 대해서 좀더 호의적이 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1950년 대에 발간된 “교리들에 관한 질문들”(Questions on Doctrines) 라는 책이 나온 이후 신신학을 위한 재림 교회의 문은 공식적으로 열리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는 가히 신신학계의 거성이라 할만한 포드 박사가 출현하여 미국 내의 교회와 학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결과, 교단과 학원 내에는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많은 지지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포드 박사는 그의 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화는 좋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와 칭의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신학이 현재 지성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조사심판의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자 그는 하늘에는 성소가 없다는 식의 기가막힌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과 논리를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포드 박사와 그의 지지자들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그들의 그와 같은 극단적인 결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교리들만을 받아들이게 된다(창3:6). 그리하여 자신의 현재 영적 경험과 입장에 비추어서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을 선별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격한 신신학의 주창자도 아니며 순수한 재림신앙의 옹호자도 아닌 중간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됨으로써 자신은 스스로에 대해서 좀더 포용적이고 포괄적인 신학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영적인 방향 감각과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듣는 청중의 입장에서 신신학의 기만과 위험을 간파해 내기란 한층 더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신학은 복잡하고도 두껍게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와 따라가는 자가 모두 기만 가운데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어떠한 사람도 성경과 예언의 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분명한 영적 식별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한 신신학이 주는 교묘하고도 치명적인 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셋째, 역사적인 재림신앙과 신신학을 구별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리를 혼동시키고 있는 것은 양자가 모두 동일한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정통 재림신앙을 믿는 설교자가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됩니다.” 라고 말할 때와 신신학의 추종자가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됩니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갖고 있는 정의와 개념에 있어서 역사적인 정통 재림신앙과 신신학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의, 칭의, 성화, 죄 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자가 모두 동일한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구원에 대하여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그 용어나 술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서로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 점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떠한 설교나 가르침을 듣게 되면 설교자의 논리나 말재주에 의해서 듣는 청중들은 잘못된 신앙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미국의 신신학 주창자들은 대개 교인의 수를 늘리고 젊은 청소년들을 교회에 붙잡아두기 위한 일환으로서 요즘 개신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축제식 예배방식이나 안식일의 축제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들의 정체를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많은 경우에 그들의 신조와 믿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 신신학의 옹호자들은 유교적인 사상과 전통에 묶여서 축제식 예배 방식을 아직까지는 미국처럼 과감하게 도입하고 있지 못하고 는 것 같다(일부 젊은 층에서는 이미 도입하여 초기 단계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참고로 미국에서의 축제식 예배의 도입과정을 소개하자면, 먼저 그들은 “축제”(Celebration)라는 표현이 교인들의 귀에 어색하게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안식일 예배 순서지나 각종 교회 모임의 광고 그리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표어나 벽보 등에 “축제”라는 용어를 가능하면 자주 사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단 “축제”라는 표현이 교인들에게 익숙하게 되면 안식일은 즐겁고 기쁜 날인데 안식일에 교회에 와서 시무룩하게 앉아있으면 안된다 라고 말하면서 안식일의 축제 개념을 교인들에게 쇠뇌시키며 템포가 빠른 찬미가를 부르면서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다가 그것이 조금 더 발전하면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3, 4인조의 젊은 청년들이 단위에 올라가서 가벼운 율동과 함께 복음 성가들을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축제식 예배는 시작되는 것인데 이것이 결국에는 야릇한 조명, 드럼과 전기 기타, 대형 스크린이 동원되는 본격적인 축제식 스타일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신신학은 미국의 그것과는 달리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더욱 기만적이고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위와 같은 네 가지의 이유와 상황으로 인해서 “신신학”이라는 이름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지금 현재 듣고 따라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부인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정직하게 기만 당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교회 내에서 공개적으로 “나는 신신학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도 약간의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신학”은 교회 내에 가장 널리 퍼져있고 가장 일반적으로 허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인기 없는 이름으로 취급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식 신신학

    이제 한국에 들어온 신신학의 주장과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그것이 겉으로 노출하는 표현들을 중심으로 한국식 신신학의 겉모습을 그려보도록 하겠다.

1. 예수님을 전하고 순종의 좋은 점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러나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가장 기만적인 것이다. 그들은 표준을 높일 때 사람들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한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를 다른 개신교회들처럼 인기 있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만을 설교하기를 원하며, 그것을 “그리스도 우리의 의”라고 부르고 있다. 백성들을 교회 일에 활동적이고 행복한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설교를 투자하고 있지만, 백성들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한가지 죄는 지적하지 않은 채 남겨두도록 허용한다. 그들이 순종에 대해서 설교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우리목사님도 순종하라고 설교 한다고요”라고 말하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완전한 헌신과 결정적인 결심을 촉구하는 설교는 왠지 회피한다.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두 가지 길 밖에는 없다. 하나는 완전한 승리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완전한 패배의 길이다.

2. 예수님께서 죄를 승리하게 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 이 가르침은 현재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가르침으로서 모리스 밴던 목사에 의해서 성행하게 된 “관계 신학”인데 그는 이렇게 설교한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버리도록 하여 주실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 지금은 모른다. 그런 일은 언젠가 기적적으로 일어날 것인데, 그 시점은 주님께서 원하시고 계획하신 시간이 될 것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그대들의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 특별한 경험이 올 때까지는 주님께서 당신의 의를 옷 입혀 주실 것이다.” 예수님을 설교하고, 완전한 순종의 가능성을 설교하며, 성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지금 회개하여 죄를 버릴 것을 강조하는 대신에 죄를 버리게 되는 특별한 때가 올 것을 가르치고 있다. 죄를 버려야 할 때는 지금이며, 죄를 버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죄를 버릴 것을 호소하고 탄원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지만, 결국에 가서 죄를 버리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죄의 포기에 대한 마지막 선택이 자신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개치 않고 죄를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은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 15)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은 하나님 의지의 편에 자기의 의지를 순종 시킬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힘에 결합시켜, 어떤 경우에라도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교육 영문, 289.

3.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우리가 홀연히 변화될 때까지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는 불가능하다. 이것 역시 매우 인기리에 설교되고 있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완전하게 승리할 수 있는 시점을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로 보며 성품의 변화도 이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는다. 이 가르침은 우리들이 늦은비를 위해서 준비하는데 있어서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오류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더러운 육체는 그분의 영광스런 몸처럼 변화될 것이지만 우리의 더럽고 비열한 성품이 변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성품의 변화는 그분께서 오시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높으신 부르심. 영문, 278.

    많은 사람들이 죄짓고 회개하고 용서받는 죄의 악순환을 습관적으로 되풀이 함에 따라 그들의 양심은 무디어져만 가며, 그들의 회개는 형식적이 되어 간다. 그리하여 모든 죄를 극복하고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늦은비의 축복은 그들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신신학과 역사적인 재림 신앙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이 가르침에 와서는 분명하게 둘로 나누어짐을 볼 수 있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고 환난의 때에 보호를 받을 자들은 예수의 형상을 완전히 반사해야 한다. 나는 얽매이기 쉬운 죄, 교만, 이기심, 세상을 사랑함, 그리고 모든 그릇된 말과 행동에 대하여 승리하지 않는 한 아무도 유쾌함(늦은비)을 받지 못할 것을 보았다.” 초기문집 71.

4.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버립니까?

    많은 사람들이 시편 51:5절을 인용하면서 죄와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함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유황불에 던지울 수밖에 없는 부모의 죄를 이어받은 죄인이었는가? 우리 모두 상상할 필요가 없다. 이 성경절에 관한 본교 성경주석을 살펴보자. “다윗은 어린이들이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가진 본성을 유전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는 이 성경절에서 그의 죄를 변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크나큰 필요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성경주석 3권, 754.

    죄로 기울어지려는 경향 자체를 죄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가 있지 않은가? “죄는 불법이라” 요한 일서 3:4.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우리의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우리에 대한 유죄 여부가 결정된다.

    “어느 누구도 죄를 짓도록 강요될 수 없다. 자신의 동의가 먼저 있어야 하며, 정욕이 이성을 정복하고 죄악이 양심을 이기기 전에 반드시 그 영혼이 죄악적인 행동을 의도해야만 한다. 유혹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결코 죄의 핑계가 될 수 없다.” 교회 증언 5권, 영문 177.

5. 착하고 균형진 그리스도인 생활은 강조하지만 말씀에 대한 글자 그대로의 순종은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불편한 양심을 위로하고자 한다. 신앙 생애에 있어서 극기와 인내는 무시되고 있으며 자기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는 인색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시골생활은 바람직한 것으로서 논의되고 있지만 그것을 강조하고 적극 장려하지는 않는다. 시골생활에 대한 바람이 불 때마다 도시 전도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서 오히려 도시에 남아 있어도 된다는 핑계와 구실이 제공되고 있다. 교육 개혁과 건강 개혁은 어떠한가? 개혁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말씀 그대로의 개혁을 하려고 하면 광신의 위험성을 말하며 은근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율법주의자들을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한다. 신실하게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은 자주 하지만 “어떻게” 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킨다.

6. 구원은 선물임을 강조하지만 구원의 조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강조하면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책임은 말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희생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결과로서 일어나는 우리의 희생과 죄를 버리는 회개에 대해서는 적게 말한다. 구원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써 제시하지만, 구원의 조건인 받은 빛에 대한 완전한 순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구원을 조건 없이 누구나가 받게 되는 공짜 선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감소시키지 않으셨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조건임을 오해할 수 없으리 만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실물교훈 410.

7. 비록 날마다 범하는 습관적인 죄와 세속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았을 지라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죄를 지어도 좋다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죄를 다 이기고 정복할 수 없으며,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결과를 맺게 하는 가르침이다.

    “복음의 사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사람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믿으라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그들의 외침이다. 참된 믿음은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성경주석 6권,1073.

8. 곧바른 증언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의 연합의 원칙과는 위배되는 것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인간들의 나약함을 혼동한다. 그들은 교회의 배도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교회의 밖으로 나가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해야 된다고 설교하면서도 교회 안에 들어온 공공연한 죄와 배도에 대해서는 사랑과 동정이라는 명목 하에 이상한 무관심을 나타내며 관대해 보이는 중립의 입장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그들은 종종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 안에서 신신학과 역사적인 재림신학을 믿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서 연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데, 그들의 목적하는 바는 맹목적인 연합을 통한 문제없는 조용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흔히 “곧바른 증언은 죄인을 회개시키지 못하며 죄인들의 마음을 상하게만 할 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곧바른 증언에 대한 우리의 의무와 파수꾼으로서의 책임을 경시하게 만든다. 그들은 교회의 공공연한 죄에 대한 탄식과 영혼에 대한 동정과 사랑의 심령을 이해하지 못한다.

9. 예언의 신에 대한 확신과 신뢰하는 마음을 그들의 설교 중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예언의 신에 대한 권위와 신뢰도의 추락이 신신학의 세력을 더욱 크게 증강시키고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예언의 신을 믿지 않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믿음과 신학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언의 신을 이용한다. 그리하여 예언의 신은 서로 같지 않은 신조와 믿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써 나타내지고 있으며 때때로 백성들을 혼돈과 광신 가운데로 빠뜨리는 장본인으로 비춰지고 있다. 예언의 신에 대한 권위의 흔들림은 우리 모두의 신앙과 믿음에 대한 기준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신신학이 펼치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론과 논리의 허구성을 밝히 드러낼 수 있는 분명한 재림 신앙을 드높이는 데에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결론의 글

    앤드류스 대학의 멀빈 맥스웰 교수가 증언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 신신학은 분명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모든 사람을 신신학의 신봉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신신학을 가르치고 있다면, 비록 그가 일반 개신교의 교육기관에서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신신학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우리 중에 누가 신신학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며 한국에 들어온 신신학의 유형과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모두가 신신학의 교묘한 기만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독자들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무런 이유 없이 뜨뜻미지근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신신학은 분명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학적인 밑바탕을 이루고 있음에 틀림없다. 신신학은 진정 그리스도의 원수요, 오늘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신신학은 “죄짓고-살고”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 마음 속에 이상한 평안함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며, 똑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여 지음으로써 더 이상 그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조금 느껴도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점차적인 양심 파괴범이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죄는“열심을 내어 회개”하지 않는 것인데, 그들이 참된 회개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적인 재림신앙과 신신학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그들의 신앙적 양심은 무감각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정신과 관심은 세상에 빼앗겼고, 들을 수 있는 귀는 경고와 책망의 기별을 듣기 싫어하여서 굳게 닫혀짐으로써 영혼을 회개케 만드는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신학을 위한 유일한 처방책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이다 (계3:18).

    신신학, 그것은 참된 회개를 가져올 수 없는 신학이며, 결코 늦은비를 가져올 수 없는 신학이다. 그것은 인을 받을 수 있는 기별이 아니며, 144,000을 위해서 준비시키는 기별이 아니다. 신신학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결코 마지막 세대를 준비시키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자.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에 신신학에 대한 각별한 경계심을 심자. 우리 모두 이것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자. 불로 연단한 금, 흰 옷, 안약에 대한 좀 더 분명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개인적인 경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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