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에 들어온 신신학의 역사적 근원과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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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신학의 기만 (Deceptions of The New Theology)

저자: 콜린 스탠디쉬, 럿셀 스탠디쉬 (럿셀 스탠디쉬와 콜린 스탠디쉬는 호주의 뉴캐슬에 있는 재림 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쌍동이 형제로, 삼육 교육을 마치고 럿셀은 의사로서 방콕 위생병원, 페낭 위생병원, 영국의 벌크셜 위생병원에서 헌신하였고, 싱가폴에 있는 연합회의 예언의 신 권장 부장 및 건강 절제 부장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호주에서 남은 무리 선교기관의 책임자로 있음, 콜린은 시드니 국립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하였고, 미국의 메린랜드 주에 소재한 콜롬비아 삼육대학의 대학장 등 여러 재림 교회 대학에서 헌신하였으며, 현재 하트랜드 선교기관의 책임자로서 일하고 있음)

제2장 재림교회에 들어온 신신학의 역사적 근원과 행로

 많은 재림 교인들은 신신학을 70년대에 있었던 한 현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재림교회의 역사 학도들은 그것이 이미 재림교회 역사의 초기에 시작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844년 직후 각양 각색의 광신주의와 빗나간 견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하심으로 인해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적은 무리가 1840년대와 1850년대의 그 참담한 분열의 와중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다. 1844년의 대실망 이후 단지 소수의 무리만이 신실하게 말씀을 연구함으로서 다니엘 8장의 2300주야에 대한 윌리암 밀러 (William Miller)의 해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이전 교회로 되돌아 갔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그리스도 교회로부터 떠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 재림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이 단체는 계속해서 지속되었고 기독교회 내에서 진실한 한 작은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일요일 신성성을 그대로 신봉했으며 어떠한 괄목할 만한 복음적 발전도 없었다.

성소 기별에 대해서 연구하던 몇몇 사람들이, 성소가 정결하여 진다는 의미는 이 세상을 불로써 태우는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께서 성소의 둘째 칸, 즉 지성소 봉사의 시작을 뜻하는 것임을 명백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2300주야의 예언을 올바르게 해석한 사람들은 사람이 죽는 것은 잠을 자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은 신념 가운데서 서로 굳게 결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한 계시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관한 계시를 받아들였고, 얼마 후에 건강과 교육에 관한 일련의 계시된 진리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거기에도 분열은 있었다. 1850년대에, 지금 현재에도 존재하는 제칠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우는 단체가 생겼는데, 그들은 엘렌 화잇 (Ellen White)의 예언적 은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심한 비난의 정신을 나타내 보였다. 이 무리는 오늘날에도 작은 교단으로 존속하고 있다. 그 후 또 다른 광신주의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세기가 바뀔 무렵에 인디아나에서 있었던 거룩한 육체 운동과 매우 흡사한 운동이 바로 이 때에 일어났다.

1863년,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조직을 둘러싸고 더욱 심각한 갈등이 있었으나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을 연합의 길로 인도하셨다. 그렇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의견의 차이는 있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토론은 과열된 주장들을 야기시켰고, 갈라디아서에 서술된 율법에 관한 견해는 신학적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다니엘서에 묘사된 북방왕은 오토만 제국을 나타내는 것인가 또는 교황청을 나타내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격열한 논쟁이 되었고, 다니엘 8장 11절을 이교 로마로 적용하는 무리와 교황 로마로 적용하는 무리가 서로 나뉘기도 하였다. 심지어 유럽을 나누는 열나라 중에 훈족이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알마니가 들어갈 것인가와 같은 사소한 문제도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때때로 의견의 차이로 인해서 과열된 논쟁이 벌어졌었지만, 주님께서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믿음의 기초와 기둥 위에 연합된 튼튼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나 내부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도전이 여전히 존재하였다. 재림교회의 초기에 가장 유능한 설교자요 지도자였던 켄라이트 (Dudley M. Canright) 의 배교는 바로 신신학의 작용이었다. 그는 화잇 장로 부부의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별에 헌신하지 않은채 갈팡질팡 하였다. 1880년 즈음에는 완전히 배도하여서 다시는 밝은 빛 가운데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그는 가장 강력한 재림교회의 반대자가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성소 기별에 반대하는 글을 썼는데, 그의 신학적 이론 가운데에서 우리는 수 많은 어거스틴의 주장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재림 교회의 진리를 비난하는 그의 서적들을 온 세계에 있는 신학교들의 도서실에서 볼 수 있다.
세기가 바뀔 무렵, 교회의 연합에 또 다른 도전이 일어났다. 이 무리 중, 두드러진 인물은 벨링저 (Albian F. Ballinger) 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목회를 하였고 1905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성소 기별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칭의에만 바탕을 둔 복음을 부르짓기 시작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오늘날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회를 이렇게도 심각하게 붕괴시키고 있는 이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콘라디 (Louis R. Conradi) 는 현대판 벨링저로서 초기 재림교회 내의 신신학주의자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젊은 독일인으로서 미국에 살던 그는 1870년에 재림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888년의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때, 화잇부인이 와그너 (Waggoner) 와 죤스 (Jones) 의 기별을 지지하자 예언의 신을 비난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한번도 지지한 일이 없었다.

한때 콘라디는 소련의 우크라이나 지방에 있는 독일인 사회에서 목회하였고 그 후에 유럽 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거기서 그는 거의 독자적으로 예언의 신의 기별을 사장시켜 버렸다. 그는 예언의 신의 원고들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를 거부했다. 유럽 지회장 당시의 그의 그러한 결정으로 인해서, 사실 그에게는 오늘날 유럽의 재림교인 사이에 편만해 있는 예언의 신에 대한 무관심과 부정적인 태도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는 성소 기별을 믿지 않았으며, 죄에 대한 승리도 믿지 않았고, 칭의에 관한 이론만을 믿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재림교인들을 전쟁에 나가도록 인도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으며, 그 결과로 인해서 개혁교회의 분리가 촉진되었다. 그의 유럽에서의 역할이 매우 의문스럽게 되자, 1920년 그는 대총회 현장 서기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그의 견해가 더욱 뚜렸하게 드러나게 되자, 당시 대총회장이던 윌리암 스팬서 (William Spencer) 목사의 주도하에 그는 대총회로부터 제거되었다. 1932년 76세의 나이로 그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떠나 제칠일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콘라디는 수 많은 여행을 했는데, 그는 자신이 만나는 여러 휼륭한 지도자들로 하여금 배도하는 일에 동조하도록 하기 위해서 애썼다. 일례로서, 한때 대총회 목회부장을 역임한 바 있는 로이 앤더슨 (Roy Allen Anderson) 목사는 당시 영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콜린 스텐디쉬(이 책의 저자)에게 말하기를, 콘라디가 자기를 그의 배도에 가담시키기 위해 애썼다고 하였다. 1920년대에 콘라디는 호주 사람인 윌리암 플레쳐 (William W. Fletcher) 목사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는데, 당시 플레쳐목사는 남아세아 지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호주로 돌아온 플레쳐 목사는 당시의 호주-아세아 선교 대학 (Australia Missionary Collage), 현재의 아본데일 대학 (Avondale Collage) 의 성서 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신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그의 가르침은 사, 오십년 후에 신신학의 거장으로 등장했던 데스몬 포드 (Desmond Ford) 의 가르침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호주 연합회장이었던 챨스 왓슨 (Charles H. Watson) 목사는 이를 크게 우려하여 플레쳐 목사를 대총회로 보냈고 거기서 그는 대총회장 스파이서 (W.A.Spicer) 목사를 포함한 16-17명의 대총회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플레쳐 목사는 사역을 떠나게 되었다.

아톨 파이퍼 (Athol Piper) 박사의 보고에 따르면, 플레쳐 목사의 책상 설합에는 플리멋 형제 교회 (Plymouth Brethren Church) 의 책자들이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파이퍼 박사는 고인이 된 알벨트 파이퍼 (Albert H. Piper) 목사의 아들인데, 그는 호주-아세아 선교 대학에서 플레쳐 목사가 사직하게 되자 잠정적으로 종교 부장직을 인계 받아서 어려운 책임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플레쳐 목사가 심취해 있던 그 플리멋 형제 교회는 신신학과 매우 유사한 가르침을 가르치는 교회였다.

수년전 콜린 스텐디쉬는 플레쳐 목사가 배도한 후에 저술한 저서인 "내가 믿는 이유"라는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이론과 70년대 신신학의 선봉이었던 데스몬 포드 (Desmomd Ford) 박사의 주장 사이에 존재하는 놀라운 유사성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76년, 럿셀 스텐디쉬(이 책의 공동 저자)는, 약 50여년 전에 플레쳐 목사로부터 자신의 견해를 변호하는 글을 받았었던 아더 나이트 ( Arthur Knight) 목사와 함께 지낸 일이 있었다. 그때 나이트 목사가 럿셀에게 보여준 자료는 플레쳐 목사가 어거스틴의 오류를 많이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확증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은 플레쳐 ( W.W.Fletcher) 목사의 영향은 그의 배교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50년대에 들어와 우리는 다시 그의 영향을 목격하게 되었다. 로버트 그리브 (Robert Greive) 목사는 그 당시 유명한 대회장으로서 남 퀸스랜드 대회장을 거쳐 그 당시에는 북 뉴질랜드 대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그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그 젊은이들은 1950년대 초반에 호주의 아본데일 (Avondale) 대학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한꺼번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떠나 어거스틴 신학의 이론을 신봉하게 되었다.

데스몬 포드 (Desmond Ford) 박사의 배교를 전적으로 이전 사람들의 배교와 관련짓는 것은 좀 무리일지는 모르나 그들의 영향이 포드 박사의 배교에 크게 작용하였음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어거스틴의 이단적인 가르침 중의 어떤 이론들이 당시 와싱톤 디씨 (Washington D.C.) 에 있었던 우리 교회의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일찌기 1947년에, 적어도 한 명의 교수는 신신학의 가장 핵심적 쟁점인 그리스도의 본성을 타락하지 않은 본성으로 가르쳤던 것으로 보고 되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그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교수들에 대한 염려가 높아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신학교의 교수들이 신신학의 개념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재림 신학에 대한 그들의 과도한 비판적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 몇몇 교수들을 다른 사람들로 대치하였으나 그들 역시 어거스틴의 신학에 의해서 이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외관적으로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과 표면상의 순수한 성서적 신학 이론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선배 교수들이 가르쳤던 위험한 가르침에 대처하기 위한 적절한 대책으로서 뜨거운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르치던 신학의 진면목을 파악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오류가 또 다른 오류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 말엽, 데스몬 포드라는 신학생이 그 당시 와싱턴 디. 씨.에 위치해 있던 이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후에 미시간 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주목해야 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초반에, 데스몬 포드 박사는 호주로 돌아가서 아본데일 삼육대학의 신학과 과장이 되었다. 그 당시 호주의 재림 교회는 로버트 브린스미드 (Robert Brinsmead) 의 충격으로 심한 아픔을 겪고 있을 때였다. 보수적인 재림 신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번지는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포드 박사에게서 브린스미드 (Brinsmead) 의 이론에 대항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인 개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거의 모든 브린스미드의 견해는 재림교회의 교리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기초적인 오류에 불과했다. 어쨌든 1960년대가 진행됨에 따라 그는 원죄설과 자각하지 못한 죄가 인침으로 사함을 얻게 된다는 어거스틴적 개념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복음주의적인 개신교 신학에 가까이 접근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이 70년대 초반에 그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꾸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브린스미드와 같이 아본데일 대학에 근무하면서 그와 가깝게 사귀던 포드 박사가 그에게 대항해서 교회를 수호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진정으로 즐겁게 수행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포드 박사에게 맡겨졌던, 브린스미드의 신학에 대항하여 교회를 옹호하는 역할 때문에, 포드 박사가 공공연하게 가르친 의심받을 만한 신학 이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은 없었으며, 또한 그가 아본데일 대학의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위험한 사상을 아무도 간파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1965년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아본데일 대학 출신의 다섯명의 인턴 목사(전도사)가 당시 빅토리아 대회가 주최했던 야영회에 참석하여 거기서 가르쳐지고 있었던 성소 기별에 대항하여 일어서게 된 사건이다. 그 기별은 그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의 교회 역사상 가장 휼륭하고 성공적인 목회자라 할 수 있는 조지 번사이드 (George Burnside) 목사에 의해서 제시되었었다. 당황한 번사이드 (Burnside) 목사는 당시 대회장이던 리오 로즈 (Leo Rose) 목사와 연합회장이던 존 키트 (John Keith) 목사와 함께 그 사건을 지회에 보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지회측의 지도자들이나 대학의 지도자들 중 어느 쪽도 그 인턴 목사들의 성소 기별에 대한 반대 사상의 출처인 포드 박사의 이론의 문제점을 꿰뚤어 볼 수 있을 만큼 준비되지 못했었다. 의심할바 없이 브린스미드 사상에 대항해서 교회를 옹호했던 그의 위치 때문에 호주에 있던 교회 지도자들은 포드 박사의 탈선적인 견해를 묵과하고 말았다.

70년대 초반, 로버트 브린스미드가 복음주의 운동에 의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당시, 그의 이론은 점점 더 복음주의의 가르침을 움켜쥐게 되었다. 사소한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의 신학적 바탕은 당시의 포드 박사의 견해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우리의 견해로는 포드 박사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은 비단 그가 수학했던 개신교회의 신학교 뿐만 아니라 스코트랜드의 유명한 전도자의 설교집를 탐독했던 사실도 들 수 있겠다. 매우 자주 그는 그 전도자의 견해를 그 자신의 설교의 밑바탕으로 삼았으며, 그의 설교는 칼빈주의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어거스틴 신학을 포함하고 있었다.
1970년 초반에 포드 박사는 영국의 맨체스터 (Manchester) 대학교를 방문하여 거기서 브루스 (F.F. Bruce) 교수 아래에서 수학했던 적이 있다. 부루스(Bruce) 교수는 상당히 저명했던 교수로서 플리멋 형제 교회의 교인이었다. (참고: 플리멋형제 교회는 19세기 존 달비 (John Darby) 가 세웠으며 그 교회는 어거스틴 신학과 천주교회의 예수회 (Jesuit) 가 수립한 미래주의 예언 해석에 깊이 뿌리를 둔 교회임 - 역자주)

16년 동안이나 포드 박사는 호주 지회 -- 현재, 남 태평양지회 -- 의 목사로서 자신의 신학 이론을 펼쳐나갔다. 당시 불과 몇 안되는 소수의 신학자들 만이 그의 오류에 대해 알아 차리고 있었다. 그의 지도자로서의 매력과 탁월한 말재주와 사진처럼 명확한 기억력은 학생들을 그의 신학적 개념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문제는 점점 증가되어 같다. 포드 박사와 그의 제자들의 설교는 호주 지회에 있는 대학들과 대학원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새로운 견해가 젊은 신학도들에게 가르쳐지게 되었다. 교인들은 매주일 강단에서 새로운 견해가 섞여 있는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성경 연구에 대한 열성은 식어졌고, 거짓 목자들이 먹이는 먹음직하고 그럴듯하게 들리는 거짓된 재림 신앙으로 인해서 수많은 교인들이 희생 제물이 되어갔다.

여기서 우리가 급히 추가하고 싶은 말은 이 신신학의 영향은 비단 어떤 특정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온 유럽에 끼친 콘라디의 영향은 너무나 침투적이어서 어쩌면 유럽에 있어서는 한 나라도 재림교회의 신앙의 정로를 벗어난 가르침에 오염되지 않은 나라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도 공히 미국이나 호주 또는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의 영향과 또 그 곳에 가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국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신신학은 놀라울 정도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남미 지역에는 이런 지역들처럼 신속하지는 않지만 이 지역에도 서서히 길을 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급속히 재림교회의 신자들을 그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신신학의 침투에 대항하여 용기있게 투쟁해 왔고,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 우리의 학교와 대학의 신실한 교사와 교수들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바이다.

신신학은 세계적인 문제거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남은교회를 탈선시키려는 시도 하에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화잇 부인의 증언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면 사탄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비성서적인 구원에 관한 신학을 받아들이면, 셀 수 없이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참하게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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