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교회가 이러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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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교회가 이러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최근에 한국 재림 교회의 한 형제가 본 선교 기관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그 형제는 구원에 대하여 재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있던 중 얼마 전에 자신이 읽은 책, “넉넉히 이기느니라”의 내용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본 선교 기관으로 질문하여 왔다. 우리는 그 형제의 신학적 진지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질문에 대하여 가능한 한 구체적인 답변을 보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본 선교 기관이 그 형제에게 보내 준 답변을 기사화하여 이번 호에 싣기로 결정한 이유는 오늘날 재림 교회를 다니고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마음 속에도 구원에 대한 동일한 의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 호는 재림 교회가 믿는 구원의 도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문을 갖고 있는 수많은 재림 교인들에게 분명한 답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책, “넉넉히 이기느니라”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1990년, 본 선교 기관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완전 문제를 강조하는 마지막 시대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국에 있는 많은 평신도들이 그 복음의 부르심에 응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온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는 놀라운 부흥이 미주 재림 교회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미주 재림 교회의 세 분의 목사님들이 모여서 본 선교 기관이 가르치는 복음을 비판하는 책인 “넉넉히 이기느니라”를 공저하게 되었다. 그 책에서 세 분의 목사님들은 각각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완전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다. 그 책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 재림 교회 내에서 구원론에 관해서는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여 왔으며, 그 책의 발간을 통하여 신신학은 한국 재림교회 안으로 거침없이 밀려들어 오게 되었다.

본 선교 기관에 편지를 보낸 형제는 “넉넉히 이기느니라”를 읽으면서 갖게 된 여러 가지 의문점을 본 선교 기관으로 질문하였는데, 다음에 이어지는 글은 본 선교 기관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내준 내용을 기사화 한 것이다.

편지 내용
“OOO 형제님, 온 가족 모두 다 평안 하십니까? 참으로 좋은 질문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내드리오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36.
여기서 저자는 구원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한번의 죽으심은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를 충족시켰으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전가되어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한다.”

이런 표현은 마치 “칭의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그것은 칭의의 경험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복음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죄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하여 일어나는 이 놀라운 변화에 의하여 승리의 생애는 가능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저 주시는 의의 선물입니다. 칭의에 대한 화잇 부인의 설명을 들어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안개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때, 그 마음은 그분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그 뜻은 그분의 뜻에 몰입되며 그 정신은 그분의 사상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바로 이것이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COL 312.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율법을 범하면서도 그분의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굳게 붙들고 죄짓기를 중단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가려 1권.

넉넉히 이기느니라, 47.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죄 없는 완전이 아니라, 죄짓지 않는 완전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은 올바른 말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54, 55.
여기에서도 칭의에 대한 면만이 너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완전함이 우리의 완전함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처럼 승리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잇 부인은 이 책의 저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명령은 허락이다. 구속의 경륜은 우리가 사단의 권세에서 완전히 회복됨을 계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겸비한 영혼을 죄에서 분리시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모든 회개하는 영혼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로 죄를 범하지 않는 길을 마련하셨다. 유혹자(사단)의 힘이 그릇된 행동에 대한 구실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러한 소리를 들을 때에 기뻐한다. 죄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핑계이다. 죄를 범하는 일에 핑계가 있을 수 없다. 거룩한 기질,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가 모든 회개하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자되신 그리스도의 생애가 완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저희 생애가 완전하여야 한다” 시대의 소망1권, 152.

그 책을 공저하신 세 분의 목사님들이 무슨 의미로 왜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지를 직접 들어 보고 토론해 보지 않는 한 그 의도를 간파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그분들이 몰고 가려고 하는 결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64.
여기서 저자는 “나누어 주시는 의는 입혀주시는 의에 의하여 완전하게 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예언의 신의 내용들을 골라내어 자기의 구미에만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형평성을 잃은 것입니다. 같은 말들을 가지고도 어떠한 결론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인용하는 가에 따라 독자들을 엉뚱한 길로 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를 통하여 십 수년 전에 세워진 이런 모호한 견해들이 지금의 엄청난 신신학의 오류들이 들어 오도록 문을 열어 놓은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영감의 말씀들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시선을 하늘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가르침의 영이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구주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그분의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는가에 관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이해하기를 심히 갈망하셨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셔서 그 회복시키는 능력으로 인류를 향상시키시고자 함이었다. 예수께서 저들 가운데 나타나시는 바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나타내신 바 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당신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가질 수 없는 어떤 특성을 나타내시거나
어떤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의 완전한 인성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시대의 소망, 664.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의 때가 곧 우리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지 못한 경험 즉 사람들이 얻기를 너무도 게을리하고 있는 한 가지 경험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 .... 그 환난의 때에 각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겔 14:20.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그가 발을 붙일 어떤 곳이 있는지 찾는다. 그러던 중 어떤 죄된 욕망을 품게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유혹의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와 분리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우리의 품성을 그 거룩하신 모본을 따라 이루는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리자들과 협력하는 일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다. 이 일을 게을리하거나 지연시키는 자들은 누구나 그들의 영혼을 가장 무서운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다” 대쟁투, 622.

화잇 부인께서는 칭의의 면을 등한시 하신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면을 덜 강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마지막 시대에 남은 무리가 경험해야 할 지성소의 정결의 경험을 확실하게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입혀 주시는 칭의의 면과 예수님의 보호해 주심만 강조해 버리면 우리는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이해에서 전혀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재림 교회를 세우실 필요가 있으셨겠습니까? 재림교회의 영원한 복음의 결론은 심판과 지성소의 정결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당신의 것이라고 주장 하실 수 있는 여지를 드리게 되는 것을 포함하여야 하지요. 책, 넉넉히 이기느니라의 문제는 바로 그러한 결론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70, 71.
여기서 저자는 칭의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그리스도의 입혀 주신 의로만..”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로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많이
애를 쓰고 있는 입장을 보게 됩니다. 신신학자들이 상투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In Christ only motif”(그리스도 안에서만) 와 “Justification alone!”(오직 칭의로만) 이라는 표현과 가르침을 영원한 복음과 섞어 놓으려고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동일한 예언의 신을 인용해도 어떤 의도로, 무슨 말씀들을 골라서 어떻게 강조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전달 될 수가 있지요. 개신교회에서 같은 성경 말씀들을 가지고 영혼이 영원히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90.
그 책의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첫째, 중보자 없이 환란을 겪어야 하는 성도들의 경험 가운데 나타난 완전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그러한 죄 없는 완전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는 두 가지 오해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죄성이 전혀 없는 인성이라는 생각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요,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승리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신신학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부분이 좋고 은혜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독자들을 인도해 가려고 하는 방향이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이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영감의 글은 신신학의 독을 치료하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자되신 그리스도의 생애가 완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저희 생애가 완전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이 되셨다... 예수는 인간의 운명을 지셨으나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의 품성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시대의 소망 2권, 26,27.

다시 같은 페이지를 보십시요!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은혜의 시기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사단은 그들의 부족함을 들어 그들을 고소하고 있으며, 성도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근거를 자신들의 죄없는 완전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입혀 주시는 의인 속죄의 공로와 구원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만이 절대적인 완전이며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은혜는 그것을 받은 가치가 없는 죄인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인데, 마지막 환란을 겪는 성도들은 자신의 완전이 아니라 이러한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다.” 참으로 이상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의 시기가 지난 후, 환란의 시기에 서는 성도들은 그들의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기의 14만 4천은 자기들이 해결하지 아니한 죄들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슈(issue)는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의 현시를 증거하는 우주 앞에서의 특별한 증거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 교회가 이해하는 진정한 복음의 결론인 것입니다. 야곱의 환란의 때는 사단이, 이미 죄의 도말을 받은 성도들에게 그들이 용서받지 못한 것이라는 고소를 통하여(용서 받은 죄악들을 다시 꺼집어 내어 생각케 함으로)그들을 낙망케 하려고 애쓰는 것이 이슈입니다. 다음과 같은 영감의 말씀은 저자의 잘못된 생각들을 여지없이 밝혀 냅니다.

“적은 무리는 그(사단)의 최상권을 거부하고 있다 ....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케 한 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므로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가장 크게 과장하여 제시하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도록 제거된 것처럼 그들도 똑같이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죄는 용서해 주시면서 자기와 자기의 부하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단은 그들이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어 멸망시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한 것에 대하여 사단이 비난함으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시험하도록 사단에게 허락하신다 .... 사단은 그들의 상태가 절망적이며 그들의 오점은 영원히 씻어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 그들을 위협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그들의 믿음을 파괴시킴으로 그들이 그의 유혹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버리게 하고자 희망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을 죽이고자 열광하는 원수들에게 에워싸일지라도 그들이 겪는 고민은 진리를 위하여 당하는 핍박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직껏 모든 죄를 다 회개하지 못하지나 않았는가, 혹은 그들의 어떤 결점 때문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계 3:10)라고 하신 구주의 약속을 성취시키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한다. 만일 그들이 용서를 받았다는 보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고문이나 죽음 앞에서도 위축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무가치함이 입증되고 그들 자신의 품성의 결함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만일 야곱이 속임수로 장자의 상속권을 빼앗은 죄를 사전에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심으로 그의 생명을 자비롭게 보호해 주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환난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민과 공포로 괴로워할 동안 만일 아직 자복하지 아니한 죄가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면 그들은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절망이 그들의 믿음의 줄을 끊어 버리고,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도움을 애원할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고 있는 동안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 숨겨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의 죄는 이미 심판정에서 도말되었다. 그들은 그 죄들을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다” 대쟁투, 618-620.

위의 말씀을 읽으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강조해야 하며 또한 백성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재림 교회에게 주어진 현대 기별을 정확하게 모를 때, 칭의와 성화와 완전에 대한 이상한 오해를 갖게 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3장에는 참으로 가슴 아픈 오류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두가지 면에서 실수를 범하고 있지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오해, 그리고 칭의를 두드러지게 강조함으로 마지막 남은 무리가 경험해야 할 중요한 이슈를 간과해 버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저자의 글을 한번 읽어 봅시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116.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본성적으로 죄도 있고 죄를 짓고 싶은 성향도 있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죄 없는 본성을 가지셨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야말로 신신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신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화잇 부인의 증언을 들어 봅시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던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무한한 치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의 영향으로 생기는 결과를 받았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서 볼 수가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보여주셨다” 시대의 소망 1권, 46.

넉넉히 이기느니라, 141,
“완전한 품성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잘 가꾸고 보살피는 것은 물론이요, 완전한 밭과 완전한 종자도 관련되어 있다. 아무리 잘 가꾸고 보살핀다 해도 근본이 되는 밭과 씨앗에 문제가 있으면 완전한 열매를 기대 할 수 없다. 즉 본성이 완전하지 못하다면 품성도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본래는 인간의 본성이 완전했었다. 따라서 완전한 품성을 이룰 수가 있었다.” 저자는 여기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주안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완전하게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 역시 우리는 화잇 부인의 증언을 들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점으로든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보다 더 어려운 투쟁을 당한다면, 그가 우리를 도우실 수 없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구세주께서는 온갖 약점을 가진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시험에 굴복할 가능성을 가진 사람의 성질을 취하셨다. 우리는 그가 당하지 아니한 시험은 하나라도 당해야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시대의 소망 1권, 140.

“구주께서는 연약한 인성을 취하시고 죄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인간성의 약점 때문에 승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오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는 인성이 신성과 연합할 때에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치료봉사, 164.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세상의 질고를 지신 것은 우리들에게 우리도 죄없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우리의 말들과 행동들과 영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생애에 이러한 능력을 나타낸다면 우리도 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 Upward look, 303.

넉넉히 이기느니라, 154,
“우리의 죄악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비교해 볼 때, 불완전하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평생 동안, 또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기쁨과 불안, 소망의 밝음과 죄의 어두움, 내세의 능력과 나 자신의 악함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긴장 관계에 있는 역설적 삶을 역동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신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말을 돌리고 돌리는 것이지요.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죗된 본성에 초점을 맞추어서 복음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면 언제나 패배주의적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화잇 부인은 죄의 문제에 관하여 단 한번도 애매모호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죄짓기를 멈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RH 1894.8.28.

넉넉히 이기느니라, 156,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최선의 의도와 노력을 받아 주시고, 모자라는 부분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로로 덮어 주신다. 신자의 완전을 계명에 대한 충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복음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그런 설교를 듣는 재림 신자가 과연 모든 죄를 승리하려고 노력하게 되겠습니까? 화잇 부인의 분명한 설교를 들어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충분한 믿음을 갖지 못한 자들은 그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이다” RH 3.10, 1904.

넉넉히 이기느니라, 158,
“그리스도인의 불충분함과 불완전함이 주님 안에서 완전함을 얻는다. 십자가 밑에 엎드린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모두 동등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즉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완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마는, 독립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함과 같은 완전을 소유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승리를 경험 할 수 있다고 강조해야 할 시점에 재림 교인들의 마음을 부패시키고 혼돈케 하는 말들이지요.
“반드시 순종하는 일이 요구되며 또한 완전한 생애를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는 공의롭지 못하며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비난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RH 2.7, 1957.
“단 한번이라도 그것을 완전히 정복하기에는 무력하다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말라” Letter 31, 1893.

넉넉히 이기느니라, 160.
여기에 나오는 소제목은 큰 오해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완전하게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입혀 주시는 완전한 의를 믿음으로 적용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러한 설명은 칭의가 무슨 경험인지를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입혀주시는 의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뜻을 화잇 부인의 글에서 찾아 봅시다.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라도 가리워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 속에서도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실물교훈, 32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복종하게 될 때,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최고의 안내자로 모실 때, 우리의 의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실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며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속에 숨겨진 의인 것이다” MC 43, 1907.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죄인이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범죄로부터 돌이켜 계명을 순종하게 될 때 그분의 완전함과 의를 그들에게 입혀 주신다” FILB 115.

넉넉히 이기느니라, 163,
“마귀의 공격을 방어하고 환란의 때를 통과하기 위한 유일한 대비는 그리스도인들의 완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한 대속의 피이다.” 저자의 이러한 말은 다음과 같은 화잇 부인이 기록한 대쟁투의 말씀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입니다.
“개국 이래로 없던 환란이 미구에 우리에게 닥쳐 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지 못한 것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얻기를 너무도 게을리 하고 있는 한 가지 경험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환란의 때에 각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으셨다. 바로 이것이 환란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 쟁하, 492.

넉넉히 이기느니라, 173, 174,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회개하거나 중생하는 일이 없을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이미 속죄의 피를 이미 거절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구원의 반열에 속한 사람들이 중보자 없이 설 수 있는 근거는, 회개할 죄가 없는 상태의 완전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속죄의 공로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다면, 대쟁투, 620 페이지에 나오는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고 있는 동안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 숨겨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의 죄는 이미 심판정에서 도말되었다. 그들은 그 죄들을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다.” 는 말씀은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예언이 신을 제껴 놓고 자신의 신학을 세워 나갈 때,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175.
“십사만 사천이 은혜의 시기의 끝에 환란의 때를 위해 무장되는 것은 자신들의 품성의 완전이 아니다.” 이런 가르침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화잇 부인의 기록을 제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이 그치게 될 때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앞에서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저들의 옷은 흠이 없어야 하고 저들의 품성은 피뿌림을 통하여 죄에서 깨끗해 졌어야 한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저들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악과의 투쟁에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 대쟁투 하권, 192.
넉넉히 이기느니라의 제4장은 신신학의 극치를 달려 가고 있습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226.
“우리는 왜 범법자로 칭하여 졌는가? 우리 자신의 불순종 때문인가? 아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이다. 우리 자신이 범법하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 때문에 죄인이 되었으므로 죄를 짓는 것이다. 고의적인 행위로 죄를 짓기까지는 죄인이 아니다가 고의적인 행위로 죄를 지을 때 비로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이런 정의야말로 요한 칼빈의 신학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순수한 신신학의 정수입니다. 요한 칼빈이 그의 책 “기독교 신앙의 설립” 에서 죄에 대하여 설명하였던 내용을 살펴 봅시다. “모든 사람은 원래부터 부패하게 되었다…. 죄의 책임은 본성에 있는 것이다…. 어린 아기까지도 그 어머니의 태 속에서 고통할 때부터 그는 정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인간들은 포악하게 태어난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죄인이다” 2권, 1장 pp 5-10, 27.

그러나 화잇 부인은 여덟 번이나 반복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법을 범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요일 3:4).” (시조, 2권, 363, 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재림교회 성경주석 7권, 951. 대쟁투, 493. 등등). 신신학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죗된 본성에서 자신이 범하는 죄에 대한 핑계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다음과 같은 증언의 말씀은 죄에 대한 어떠한 핑계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린아이는 악으로 기울어지려는 경향을 가진 본성을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크나큰 필요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본교성경주석 3권, 755.

"이성을 가진 사람마다 옳은 것을 선택할 능력을 가졌다.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편에 자신의 의지를 두고 순종하기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연합시켜서 어떠한 것도 그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강요할 수 없는 지경에 설 수 있다" 교육, 영문 289.

넉넉히 이기느니라, 228.
“타고난 이기심을 가진 우리는, 이기심은 죄이므로 행동하는 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정죄 하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역시 순수한 바벨론의 취하게 하는 포도주의 일종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232.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된 행동들 때문에만 정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기적이고 죄된 본성 때문에 정죄 하에 있다. 우리는 이것도 자복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신학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사상입니다. 만약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언제 정죄에서 벗어나서 의롭게 된다는 말인가요? 은혜의 시간이 끝나고 예수께서 더 이상 중보하지 않는 때라도 의인들은 정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새로운 본성을 주실 때까지 지옥불의 정죄를 받고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죄의 결과로 인한 영향과 죄 자체를 혼돈하면 이 문제에 있어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문제는 랄프 랄슨 박사의 책 “The Word Was made flesh” 를 참고 하시기 바라고, 특히 화잇 부인께서 호주에 살고 있었던 Baker 목사에게 쓴 편지 중에서, 예수님께서 죄의 경향(propensity)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셨다고 설명하신 말씀을 설명한 부분을 잘 참고 하시 기 바랍니다. 또한 본 선교 기관에서 발간한 책 “잃어 버린 재림 신앙을 찾아서” 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이 책은 쥬커 박사의 저서인 “Touched with Our Feelings”를 요약한 것임). 최근에 한국 시조사에서 쥬커 박사의 저서 “Touched with Our Feelings”가 번역되어 출간된 것은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 여러분들에 꼭 그 책을 구입하여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Baker 목사는 예수님을 마치 일반적인 청소년들이 실수가 많은 미성숙한 입장에서 자라는 것처럼 같은 모양으로 성장하셨다고 설명하는 그 당대의 자유주의적인 인간 예수에 대한 묘사를 설교에서 말하곤 한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치 죄를 지어 본 자들이 가지고 있는 강한 죄로 기울어진 죄의 성향(propensity)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묘사하지 말라고 꾸짖으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인간의 죄됨을 가지시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다음의 영어 원문으로 보아 인간들이 짓는 죄를 가지지 않으셨다는 뜻이지, 죄된 본성이 아닌 죄 없는 본성을 가지셨다는 뜻에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신신학자들은, 예언의 신이 말씀하고 있는 그 수많은 인용구절들, 즉 예수님께서는 4천년 동안 연약하여진 죄된 본성을 취하셨다는 말씀들을 다 무시하고 해 하필이면 Baker 목사에게 쓴 편지만 가지고 주장하고 있는지, 참으로 형평성을 잃어 버린 것 같습니다.

호 소

책, “넉넉히 이기느니라”가 발간된지도 벌써 십수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책이 재림 교회 안에 불러 들여온 각종 열매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 책은 남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변질시켰습니다. 구원의 표준이 변질되자, 곧 이어서 교회의 표준이 급속하게 떨어지게 되었고, 이와 함께 교인들은 믿음과 신앙을 잃어버린채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가게 되었습니다. 남은 교회 목사의 설교는 바벨론 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따라가게 되었으며, 경건한 예배 형식은 사라지고 시끄러운 박수와 묘한 리듬의 음악이 예배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집사와 장로들은 돈과 부도덕한 여자 문제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고, 목사들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직책을 유지시키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20년 전만해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이 남은 교회 안에서 당연한 것들로 받아들여 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불리우는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저희들의 견해입니다. 지금 재림 교회는 신신학의 급류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 교회를 급류에서 구할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인간의 모든 신학과 이론과 추측을 내려 놓고 선지자의 증언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영혼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수호하고자 애쓰는 형제의 노력에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 하시기 바랍니다!

2006년도 12월 17일 새벽에 주님의 속히 오심을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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