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말틴과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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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말틴과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밴스 훠럴

 우리 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비 재림교인이 있었다면 그는 월터 말틴이다. 그는 재림교회의 교리들을 변경시키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 그가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죽었으며, 아마 그가 왜 죽었는지까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간략한 내용을 적는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어떻게 이루어졌나?

 1950년대에 있었던 일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에 활동적으로 일했던 복음주의 신학의 강연가이자 저술인이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텐쓰(Tenth) 장로교회의 목사였던 그는 유명한 라디오 방송 목사이자 「영원한 지(Eternity magazine)」의 발간인이며 편집인이었고, 또한 여러 책을 저술해 낸 목사였다. 당시 뉴욕 대학에서 미국 종교사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이었던 월터 말틴은 왕성한 정력으로 1955년에 이미 미국내 이단 종파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저술한 바 있다.

 그해 봄, 「영원」지의 자문 편집인이며 존더반 출판사의 이단문제 전문가인 남 침레교인인 말틴이 워싱턴 D.C에 있는 대총회 본부에 들렀다. 그는 대총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 관한 자신의 다음번 책을 쓰려하는데, 자료를 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거절 당할 것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 당시 대총회의 연구 위원 중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프룸(L.E. Froom)의 사무실로 초빙을 받았다. 프룸은 대홍회 목회부장인 로이 앤더슨(Roy Allen Anderson)과 다른 연구위원인 리드(W.E. Read)를 불러 말틴과 함께 만나도록 했다. 프룸과 함께 일하던 앤더슨은 즉시 그 상황에 있어서 재림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영접함으로 그 사람들의 우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는 대총회 건물 전체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엇이든 그가 하기를 원하는 계획이 있다면 대총회장인 르우벤 휘겨(Reuben R. Fighur)가 뒤에서 밀어줄 것이었다.

 말틴은 뉴욕 주, 나이악(Nyack)에 있는 니아악 미쑈너리 칼레지의 그리이스어와 신학과 교수인 죠지 캐논(George E. Cannon)과 함께 왔는데, 사근사근하고 붙임성 있지만 늘 생각이 빠르고 예리하며 집요하게 파헤치는 말틴이 이런 식의 모임을 더 자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반하우스가 그런 모임에 참여하게 됨).

말틴의 질문서 제출

 말틴은 이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좀 의문이 가는 교리들의 목록을 제시하면서 글로 답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 지도자들은 여기서 다른 교회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회를 잡을 수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그저 말틴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식으로 답변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쓰는 책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동료 복음주의자들”이라고 쓸 것이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한 앤더슨과 프룸은 “교리들에 관한 질문들에 답변”하는 모든 일들을 준비하는 일을 지도했다.

 한 가지 점에서 그들은 확고한 입장에 섰는데, 그것은 말틴이 19세기의 우리 교회 저자들 중 어떤 이들이 아리안 주의(그리스도가 피조된 존재라는 가르침)를 주장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은 결코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말틴은 다른 우려를 표명했는데, 재림교회가 갈바리 이후에도 어떤 구속사업이 있다고 믿고,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아무래도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믿으며,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실 필요가 있으셨고, 또한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신고로 우리도 그분처럼 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프룸은 월터 말틴이 만든 첫 번째 질문들에 대한 첫 번째 답변들을 기록했다. 다음번 모임에서 우리측 지도자들은 전부 22페이지로 된 답변들을 말틴에게 건네주었고, 말틴은 새벽 2시까지 그 답변들을 검토하였다. 여러분 중 프룸의 책들(Movement of Destiny[운명의 운동]이 좋은 예임)을 읽은 분들은 프룸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낱말들을 배열하는 데 있어서 아주 탁월한 것을 알 것이다. 랄프 랄슨 목사가 “허위 자료(Documentary Fraud)”라는 기사에서 능숙하게 지적한대로 프룸은 예언의 신 인용문 중에서도 이 문장 저 문장을 맞추어 그 문장이 원래 말했던 것의 정반대로 낱말들을 나열할 수도 있었다. 그는 교묘하게 낱말들을 짜 맞추는데 능란한 사람이었다.

 그 다음날의 말틴과의 회합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그 회합에서 말틴은 그 답변을 보고 자신이 우리들의 몇몇 가르침을 오해했었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질문들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지도자들은 만일 그들이 그가 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조심스럽게 하면 미국의 주요한 개신교회들이 우리들을 동료 복음주의 교회로서 받아들여 주는데 성공하리라 생각했다.

매듭을 지음

 만일 이들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그에게 교리에 관한 이중적 답변을 준다면 그것이 별로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말틴은 이러한 사적인 모임에서 얻은 타협이 교단적으로 교리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제의했다(말틴이 어떤 것을 요구할 때엔 그 요구한 것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우리 교회에 대해 반대되는 엄청난 말을 쓴 책을 쓸 것이라는 위협적인 타산을 늘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명심하는 것이 좋겠다).

 월터 말틴은 우리 지도자들에게 긴 질문서들을 주어서 우리 지도자들이 현대 복음주의자들에게 수용될만한 답변들을 쓸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재림교인들은 모든 재림교인들에게와, 또한 전 세계에 흩어진 개신교회의 도서관에 보내질 수 있는 책에 그 질문들과 답변들을 실어서 출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틴의 관심은 그 답변들이 재림교회 신자들을 이 새로운 입장 가운데로 묶어두려 했음이 명백했다.

 그러면 그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절대 이단이 아닌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며, 완전히 정통에 해당하는 복음주의 교회라고 그의 책에 쓰겠노라고 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은 1955년 봄에 시작되었으며, 1956년에 어느 정도 일이 경과될 때까지 여러 달동안 그 회합은 계속되었다. 이 이상한 새 교리 책을 대항한 세계에 흩어진 재림교인들의 밀물같은 반대를 미리 제어하기 위해 말틴은 그 책을 출판하기 전에 세계에 흩어진 많은 재림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질문들과 답변들이 보내져야 되겠다고 요청했다. 앤더슨과 프룸은 세계에 흩어진 재림교회의 지도자 250명에게 초고를 복사하여 보냄으로 후일에 그 책이 나온 후에 반대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도록 의도하였다.

 그러나 프룸과 앤더슨이 그 복사본들을 보내지 말아야 된다고 자신들끼리 동의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앤드리어슨(M.L. Andreasen) 목사님이었다. 앤드리어슨은 교단내의 다른 어떤 신학자들보다 어깨 위나 높이 선 사람이었다. 1930년대 말에 대총회에 의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신학 대학원”이 시작되기 전에 그 첫 번째 시험 케이스로 가르치도록 선정된 분이 바로 그였다. 1940년대에 그는 성소기별에 관해 여러 책을 거듭해 썼으며, 살아있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프룸과 앤더슨은 예언의 신의 기초위에 견고히 선 이 충실한 파수꾼이 구속사업이 주후 31년에 이미 마쳤다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반하우스이 폭탄기사

 반하우스는 자신이 주필인 영원 지, 1956년 9월호에 재림교회 지도자들과의 회견에 대한 첫 번째 기사를 실었다. 그것이 회견이 있었다는데 대해 공표한 첫 번째 기사였다. 반하우스는 그 기사를 “폭탄기사”라고 불렀으며, 그것은 정말 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목회 지에 아무 언급도 없었으며, 앤더슨과 프룸은 세계에 흩어진 우리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을 끌어 들이려고 여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1956년 12월호 목회 지에 복음주의자들과의 회견에 대한 첫 번째 공고를 하였고, 그 후 두 번(1958년 3월호와 1960년 4월호)에 걸쳐 잇따른 공고가 실렸다. 1956년 12월호에는 프룸의 “우리 기별의 심장인 구속”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변경하고 있는 재림교회를 향한 태도들”이라는 공고와 함께 실렸다. 프룸의 기사에서 그는 구속은 갈바리에서 있었으며, 그 후에는 구속사업이 없다고 표명한 「교리에 관한 의문들」이란 책이 나올 것이라고 관심을 환기시켰다.

리뷰 앤 헤랄드 출판사의 협력

 1957년 1월 23일, 대총회는 길 건너편에 있는 리뷰 앤 헤랄드 출판사에게 대총회 목회부를 위해 신간 도서를 발간하도록 했다. 누가 저자인지에 관해서 그 책에는 “대총회에 의해 임명된 위원회가 편집함”이라고 적게 되어 있었다. 아무도 자신들의 이름을 그 책에다 넣을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록은 프룸이 했으며, 몇몇 부분들은 앤더슨과 리드가 덧붙였다(당시 울슨과 리챠드 해밀도 리뷰 지의 편집위원이었으나 아무의 이름도 그 책에는 없다).

 지금 그 책을 돌이켜 볼 때 한쪽에는 오류가, 다른 한쪽에는 진리가 있어서 혼란이 야기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글쎄, 이 책이 진리를 가르치니까 괜찮음에 틀림없어”라는 말을 자아내도록 한다. 1988년 5월에 「교리들에 관한 질문들[Questions On Doctrines]」을 대신하여 출간된 교리책(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이렇게) 믿습니다)에도 동일한 문제들이 발견된다. 한 문단 안에 진리가 오류와 섞여 있고, 그 다음 문단에는 진리가 있으며, 그 다음 문단에는 오류가 있는 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세, 우리는 거기서 진리를 발견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죽기까지 싸운 앤드리어슨 목사

 1940년대에 우리의 성소 교리에 있어서 인정받는 학자인 앤드리어슨 목사님은 1957년 말에 간행된 「교리들에 관한 질문들」에 관해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그는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우리 교회에서의 봉사 영역에서 쫓겨나고, 교단에서는 주던 부양료도 주지 않게 되자 그는 결국 남 캘리포니아에 있는 노후 복지 사무실에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노후를 살 수 있도록 연금을 요청했다. 그의 사정을 들은 관리들이 그가 평생토록 위해서 일해 왔던 교단에서의 부양료 지급을 불법적으로 거절당한 것을 알고 우리 지도자들에 전화를 했다. 즉시 타코마 파크(대총회 본부가 있던 곳)에서 다시 그의 부양료를 보내왔다.

 몇 년 후 늘 건강하던 앤드리어슨 목사님은 출혈궤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전쟁은 그로 하여금 목숨을 치루도록 하였는데, 아마 이 모든 일이 끝나기 전 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표준들과 교리들을 옹호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훌륭한 일 아닌가!(앤드리어슨 목사님의 6개의 기사로 이루어진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한 기사가 이번 호에 실려 있다-편자).

월터 말틴과 엘렌 화잇

 월터 말틴은 예리한 사고의 정력적인 사람이었다. 오랫동안의 힘든 일의 연속은 후일 비만증과 당뇨병을 포함한 신체적 문제를 가져왔다. 아이러니컬하게 1980년대 초에 신체의 무리가 오게 되자 그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시에라 네바다에 있는 위마(Weimar Institute) 요양원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엘렌 화잇에 의해 지시된 건강 원칙대로 돌봄을 받음으로 많은 호전을 보게 되었다.

 그는 엘렌 화잇에 관해 어떻게 말했는가? 그는 그녀에 대해 말할 때 늘 매우 조심스러웠다. 또한 그녀가 많은 진리를 소유한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89년에 그의 그러한 태도는 변했다. 그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에 월터 말틴의 마지막에 대해 얘기할 때 더 쓰도록 하겠다.

그에게는 득, 우리에겐 손실

 말틴은 여러 해를 둔 회견을 통해서 우리 지도자들에 의해 교리적인 타협의 내용이 들은 1957년에 간행된 「교리에 관한 질문들」을 출판하도록 하고 우리 교회를 “비그리스도교” 혹은 “이단”이라 부르기를 거절함으로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것을 얻었다. 그 모든 일은 그에게는 득이었고, 우리에겐 손실이었다. 그 손실의 결과는 오늘날 아직도 우리 가운데 남아 있다. 그 결과는 사라지는 대신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 표준과 교리에 있어서 잇따른 문제들을 계속 가져오고 있다.

 만일 우리가 1950년대에 우리의 교리들을 싹둑 동강내어 개신교회들에게 팔아먹지 않았었더라면 우리 대총회는 오늘날 우리 목사들로 하여금 결혼반지를 끼었더라도 침례를 주도록 요구하는데 그렇게 신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로마 천주교의 변호사들을 고용하여 재림교인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어 감옥에 넣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요구

 1980년 여름에 데스몬드 포드의 신임서를 회수하고 「교리에 관한 질문들」책의 출간을 중지했다. 말틴은 현 세대의 대총회 지도자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그 책을 다시 출판하도록 거듭 기별을 보냈다. 그리하여 그 책에 있는 신신학의 개념들이 다시 인쇄되어 공적으로 옹호되도록 말이다.

 그는 만일 우리가 그 책을 인쇄하여 다시 내놓아 데스몬드 포드가 품고 있었기 때문에 희생당했던 견해를 지지하는 목사들을 옹호하지 않으면 우리를 이단이 아닌 그리스도교회라고 했던 자신의 종전 입장을 곧 취소해 버릴 것이라고 공중강연에서 우리 지도자들에게 경고했다. 그 강연에서 그는 자신이 대총회에 자신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요구했노라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크고도 명확하게 말했다.

 그 문제에 관해서 충실한 우리 교회의 신자들이 대총회에 「교리에 관한 질문들」을 더 이상 재판하지 말도록 긴급한 편지들을 보냈는데, 그에 대한 조심스러운 숙고 후에 대총회는 그 책이 재판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 백성들에게 확신시키는 편지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월터 말틴이 신간 교리 책을 보고 우리 교회를 주요 이단으로 취급한다는 위협을 하지 않고 무언지 그의 기분이 누그러진 듯한 것을 볼 때 우리는 당황해 했다.

 그때에 우리 측에 있는 타협자들은 충실한 신도들보다 더욱 똑똑했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1957년 이후에 우리 교회가 이단이 아닌 정통적인 복음주의 교단에 속한다는 위치를 잃을까 두려워 한 어떤 대총회 지도자들이 말틴에게 그들이 「교리에 관한 질문들」 때문에 코너에 몰려 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이 재판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니 「교리에 관한 질문들」 대신에 새로운 교리 책을 내놓는 것이 현명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은 말틴에게 이 새로 나오는 책도 그렇게 계속 나와야 된다고 고집하는 「교리에 관한 질문들」이 가지고 있던 주요한 교리적 타협점들을 지닐 것이라고 말틴에게 확신시켰다.

새로나온 교리책

 1988년 5월, 새로나온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이것들을) 믿는다[Seventh-day Adventists Believe]」는 교리책이 리뷰 인쇄소에서 나왔는데, 이 책에는 「교리에 관한 질문들」에 실렸던 동일한 오류들이 그리스도의 본성 문제만 제외하고 모두 실렸다.

 이 두 책은 여러 가지 점에서 너무도 유사하다: (1) 두 책 다 월터 말틴이 우리로 복음주의자들 측에 끼도록 하기 위해 요구했던 거의 모든 오류들을 실었다. (2) 두 책 다 한사람 혹은 두 사람이 조용히 써서 더 큰 위원회에 의해 승인을 받았고, 둘 다 진리와 오류가 섞여 있으며, 수정하는 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역사적인 재림신앙을 적어 넣으려고 수정이 가해졌다. (3) 둘 다 리뷰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갑자기 광고가 되고 판매가 되어 전 세계로 보내지는바 되었다. (4) 둘 다 딱딱한 표지에 리뷰 사에서 나온 다른 책들에 비해 굉장히 싼 값으로 팔렸다. (5) 둘 다 대총회의 십일조 기금의 지원을 받아 은밀하게 쓰여져서 수만권이 전세계에 흩어진 주요한 개신교회와 대학의 도서실에 물료로 운송되었다. (6) 둘 다 월터 말틴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교리적인 타협이 재림교인들의 생애 가운데 침투하고 있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비극

 우리의 교리적 신조들이 현대의 개신교들의 그것과 일치해야만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우리가 지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교단엔 100여년 전 제수잇 요원들이 점령해 버렸으며, 우리 교단은 엘렌 화잇의 사망시까지 성공적으로 침략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죽기 전에는 우리 교단의 어떤 주요한 인물들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그녀가 지시를 받았다. 복음주의자들과의 회견에서 성취된 것은 우리의 가르침을 배도한 현대의 개신교주의의 가르침과 신속히 연결시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법도 없는 성화의 기별로 강조하고, 그저 매일의 생애와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끝이 아닌 끝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 회견에 참석했던 자들은 앤더슨과 월터 말틴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들었다. 그후 은퇴한 앤더슨 목사님도 로마린다 지역에서 잠들었다.

 그러나 말틴은 1989년 3월 15일, 캘리포니아 주의 후레스노에서 납득이 안가는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강연에서 그는 예언의 신과 우리의 가르침들을 전에는 하지 않았던 태도로 무시하고 공격해댔다.

 그 후 곧 로마린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강연이 1989년 6월 26일, 월요일에 있겠다고 광고되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친구는 말틴이 6월에 있을 강연에서는 재림교회의 신앙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사적으로 말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1989년 6월 26일, 월요일 아침 6시, 월터 말틴 박사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잠을 깨었을 때 갑작스러운 심장마비가 와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끝머리에

 하나님께서는 1955년 봄, 그가 타코마 파크에 있는 대총회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그의 위협을 제거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대신 우리는 간교한 꾀를 쓰려했고, 우리 원수들과 연합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패배를 당했다.

 아아, 얼마나 큰 수치, 수치인지! 우리는 회개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고집하며 해마다 더 깊은 배도의 수렁으로 들어가고 있다. 때때로 어떤 이가 일어나 개혁을 부르짖을 것이나 그에 대한 반응은 “저기 또 문제거리가 일어났군! 처단해 버려야지!”일 것이다. 그리고는 우린 다시 잠잠히 누워버린다.

 그러나 심판의 큰 날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갖는 것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 이전에 무덤으로 간 몇몇 확고한 지도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것보다 더 크게 저항했을 것이다.

 월터 말틴은 우리 교회 역사에서 우리 교회의 신조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가장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비 재림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측에 우리 교단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두 지도자, 대총회 목회부장인 앤더슨 목사와 대총회 교리연구 책임자인 프룸 목사를 끌어들여 능수능란하게 우리 교단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앤더슨 목사님이 어떤 일을 하든 대총회장인 르우벤 휘겨가 자신과 함께 일하는 두 고위 지도자들이 과감하게 일을 추진해 나가도록 밀어준 사실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1955-1956년에 있었던 그 회견의 주자중 마지막 인물(월터 말틴)도 잠들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끝까지 그 회견이 남겨준 결과들과 함께 살 것이다.

* 조직 신학을 전공한 필자는 예언의 신의 염가 출간 및 보급에 주력하며, 역사적인 재림신앙을 옹호하고 고수하는 전단들을 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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