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재림 신학을 공부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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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대 제 37 호

 

재림 교회 신학생들에게 보내는 글

제3부-재림 신학을 공부한다는 의미

저자: 강명수 장로

이 글을 읽는 삼육 신학생들 중 어떤 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신학의 지자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신학을 믿는 교수들에게 강의를 듣고 그런 목회자들에게 설교를 들으면서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더 이상 “나는 삼육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정통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슬픈 일이지만 이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미국에서는 신학생들이 교수들의 신학적 성향을 살피면서 과목을 신청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여성으로 취급하는 교수를 피하기 위해서, 축제 예배를 장려하는 교수를 피하기 위해서,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우리와 다른 육체를 취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피하기 위해서, 무엇이 늦은 비를 위한 참된 준비인지에 대하여 무지한 교수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재림교회의 옛 신앙은 행함과 율법 중심의 복음이었다는 미혹의 음성을 내는 교수를 피하기 위해서, 신학생들끼리 모여서 기도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바벨론의 신학이 재림교회의 신학대학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재림교회 안에서는 1950년대 이전의 복음(정통 재림신앙)이 안교 교과나 책자들을 통하여 이따금씩 나오는데 왜 한국 교회에서는 그러한 설교와 글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한국 재림교회 안에는 1950년 이전의 복음인 성소 정결의 복음을 고수하는 교수와 목회자가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두려워서 조용히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전히 희망이 있는데 그것은 예언의 신에 기초를 둔 복음을 강의하고 설교하는 교수와 지도자들이 미국 재림교회의 이곳저곳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영 선교 기관에서 운영하는 신학교(하트랜드)에서 1950년대 이전의 복음을 배운 신학생들의 학점이 앤드루스 신학교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 어떤 졸업생들은 미국 합회 중에서 보수적인 합회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 재림교회만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 한국 재림교회는 부조들의 복음을 극단과 율법주의로 몰아가고 있습니까? 부조들의 복음을 부인하면 결국 여자의 남은 자손으로서의 재림교회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입니까? 신학생 여러분이 올바로 서야 재림교회의 복음이 올바로 세워집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회복되어야 재림교회의 신앙이 회복됩니다.

율법주의적 경험에서 신신학으로!

어떤 의미에서 신학생 여러분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신학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재림교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재림교회가 신신학에 빠지게 된 경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신학생들이시여,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갖고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들은 과거 오랫동안 완전한 순종에 대한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진실한 재림성도들이 순종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재림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온 생애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놓아야만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재림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쓰라린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세상과 재물에 대한 결정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 즉 참된 거듭남의 실제적인 경험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순종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를 경험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예언의 신이 말하는 복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따라가는 마음과 생애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옛 언약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계명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가르쳤던 복음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는 참된 중생의 경험 없이 순종하고자 애썼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주의에 빠졌던 것처럼, 여러분의 부모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에 빠졌던 것입니다.

참된 중생의 경험 없이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무모한 경험이 대다수의 교인들을 휩쓸게 되었고, 재림신도들의 신앙은 바짝 메마른 길보아 산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사단은 재림교회 안에 신신학을 등장시켰습니다. 신신학은 율법과 순종에 지쳐있던 백성들에게 “타락한 인간이 죄를 다 이기고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매력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육체, 즉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으므로 우리는 예수의 순종을 따라갈 수 없다는 가르침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갈바리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은 확정되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은 칭의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들리는 설교를 하였고, 죄는 불순종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난 상태라고 가르침으로써 원죄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있는 죄를 다 버리지 않더라도,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빛에 완전히 순종하지 않더라도 열심히 믿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히셔서 하늘로 데려갈 것이라는 설교를 반복해서 했습니다. 신신학의 그러한 가르침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자신의 거듭나지 못한 신앙 경험과 일치하고 육적 본능을 만족시켜주는 설교를 들으면서 수많은 재림교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 없이 하루 하루를 억지로 율법주의의 굴레에 묶여 살아가던 수많은 신자들과 학자들과 지도자들이 그들의 노래를 듣고 박수와 찬사를 보냈습니다.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서 세상을 버릴 수 없었고 버리기도 싫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새로운 빛(?)은 양심의 불편함과 괴로움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복음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노래에 “새로운 빛, 또는 진보된 재림신앙”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입니다. 신신학은 거의 모든 집회와 세미나에서 주요 주제로 자리를 잡았으며, 사람들은 그들의 집회에 찾아가서 자신의 저열한 경험을 위로받았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을 포기하지 않아도,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아도 하늘에 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신신학의 노래를 들으면서 죄에 대한 확실한 핑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신신학은 해를 거듭하면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사단은 율법주의적 경험으로 인하여 피곤에 지쳐 있던 재림교인들에게 신신학을 던져 줌으로써 교회를 절묘하게 정반대 방향의 기만 속으로 끌고 가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율법주의는 그 세력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신신학으로 인해서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잠 가운데에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죄를 이길 수 없다고 믿는 수많은 재림교인들에게 “부디 그 죄를 버려라!”고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은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는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쓰러뜨릴 수 없는 골리앗 장군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당신의 이상은 가장 높은 인간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높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명령은 허락이다. 구속의 경륜은 우리가 사단의 권세에서 완전히 회복됨을 계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겸비한(통회하는) 영혼을 죄에서 분리시킨다. … 죄를 범하는 일에 핑계가 있을 수 없다. 거룩한 기질,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가 모든 회개하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자 되신 그리스도의 생애가 완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저희 생애가 완전하여야 한다.” (1 소망, 311)

“가장 강한 유혹일지라도 죄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다. 아무리 그 압력이 크게 미쳐 올지라도 죄악은 우리 스스로의 행위이다. 지상이나 지옥의 세력도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강요할 수 없다. 의지가 먼저 동의하고 마음이 굴복해야만 되는 것이다.” (마라, 224, 225)

개신교회의 대학으로 보내진 우리의 신학도들

신신학은 앤드루스 대학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재림교회가 세상의 교육 학제를 흉내내며 따라가기로 결정하자, 앤드루스 대학은 미국 정부의 교육부에서 정한 방침을 준수하기 위하여 박사학위를 소지한 교수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재림교회는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앤드루스 신학대학생들을 일반 개신교 대학원과 그들의 박사 과정으로 보내어 학위를 받아오게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키며, 하나님의 율법은 폐지되지 않았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수반하게 된다고 믿는 남은 교회의 신학도가 어떻게 바벨론 신학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아올 수 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하여튼 그들은 그곳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재림교회의 교육기관으로 돌아온 다음, 그들이 바벨론 대학에서 배워 온 신기한 가르침들을 재림신앙 속에 섞어서 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의 전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순종의 좋은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세상을 어느 정도 버릴 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명백한 표준만큼 순종하고 따를 것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수준의 순종은 그들의 눈에 이미 율법주의로 보이게 되었으며, 시골 생활과 채식에 관한 예언의 신의 가르침은 우스꽝스럽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대로 살기 위한 인간의 철저한 노력과 헌신은 이미 그들에게 있어서는 구원받기 위해서 애쓰는 인간의 가련한 행위로 보였습니다. 신신학자들의 공통점은 “예언의 신”을 예언의 신이라고 부르지만 그 말씀의 권위를 자신이 배워온 신신학의 이론보다 아래에 놓는 것입니다.

“증언 가운데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어떤 것이 화잇 자매의 자신의 영감받은 말인지를 구분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마귀의 기만적인 사업을 돕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3기별, 70)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신 증언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 자신이 점화한 빛 가운데서 걷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교회를 망하게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목사나 대회장이 될 자격이 없다.” (목사, 영문 327)

“증언들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은 사단에게 속한 정신이다. 증언들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동요시키는 것이 사단의 책략이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이렇다. 만일 하나님의 영께서 주시는 경고와 견책과 권고들을 귀담아 듣는다면 사단은 자기의 기만술을 펼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없으며, 자기의 기만속에 영혼들을 묶어둘 수 없기 때문이다.” (1기별 , 55)

정통 재림신앙과 신신학에 대한 질문이 있는 분들은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www.finalG.org를 방문하시면 정통 재림신앙과 신신학에 관한 여러 가지 글과 말씀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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