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G. 화잇과 재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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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대 제 31 호

엘렌 G. 화잇과 재림교회

저자: 손계문 전도사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모든 환상적이며 기만적인 교리들이 제시될 것이다” (2기별, 25).

1860년 10월 1일 초기 지도자들이 베틀크릭에 모여 교회 명칭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s)로 채택한 후 1861년 최초로 미시간 대회가 탄생했다. 교회조직의 필요성이 계속 요구되었으나 적극적이지 않던 차에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이 때 교회에 3,500여명의 성도들이 있었으나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징집문제 등에 있어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300달러를 지불하면 타인을 고용해서 입대할 수 있어서 얼마동안은 그렇게 하다가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제임스 화잇 목사는 링컨 대통령을 만나 호소하였지만 단체가 없다고 거절당하였다. 그때 모든 교인들이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1863년 5월 20~23일 베틀크릭에서 총회를 열고 초대 대총회장을 존 바잉톤으로 대총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순수했던 초기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렌 G. 화잇은 교회가 슬픈 라오디게아의 형편에 처했다고 하면서(초기, 107) 세상과 타협한데 대하여 때론 책망하고, 때론 호소하고 또 가슴 아파 울고 있었다. 이 땅에 있는 교회 가운데 스스로 오류가 없다고 하는 교회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로마가톨릭뿐이다. 재림교회는 조직될 당시부터 완전하거나 흠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화잇 부인께서는 “하나님과 하늘만이 오류가 없다”(목사, 30)고 하였다. 선지자는 교회 안에 결함들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를 향해 곧바른 증언들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바벨론이라고 암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불완전하다고하여 그분의 교회를 멸망시키지 않으신다”(목사, 46)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절대로 잘못된 결정을 할 리가 없다거나, 교회가 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스런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사단은 하나님 대신에 사람에게 주의를 끌게 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성경을 상고하는 대신에 감독이나 목사, 신학 교수들을 그들의 지도자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이렇게 되면 지도자들의 마음을 지배함으로써 자기의 뜻대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게”(쟁투, 595)되기 때문이다.

1888년, 당시 대총회장은 와그너와 존스의 기별을 거세게 반대했다. 그때 지도자들의 권위에 굴복했더라면 오늘날 이 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리가 교회 안에 소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는 반복될 것인데, 늦은 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큰 외침”을 하게 될 때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재림교회 안에서도 그것은 광신이며 거짓된 것이라고 반대당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하는 능력이 나타날 때에 교회안의 어떤 이들은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버티고 서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기대한 것과 생각한 것처럼 주님께서 일하시지 않기 때문”(리뷰, 1890. 5. 27)이다. “그들은 셋째 천사의 큰 외침이 들려 올 때 하나님의 사업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땅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서 빛이 퍼져 나갈 때, 그들은 주님의 도우심에 부응하는 대신에 자신의 좁은 소견에 맞추기 위해서 주님의 사업을 붙들어 매길 원할 것이다”(목사, 300).

지도자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늦은 비에 대해 얘기해 왔는가? 그토록 기다렸기 때문에 이 운동이 옳은지 그른지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들의 기대와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2000여 년 전에 유대인들은 무엇인가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선지자가 예언한 시간이 가까이 이를수록 회당에서는 메시아의 예언에 대한 강론이 자주 있었고, 유대인들은 그 예언을 공부하였으며 그 말씀들을 잘 외우고 기억하였다. 우리가 늦은 비 성령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많이 이야기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저들의 최고의 관심은 메시아의 오심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을 때 그들은 받아들였는가? 저들이 기대하는 대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바로 같은 이유로, 늦은 비가 임하게 될 때 거절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스러운 이 마지막 때, 교회 안에 진리를 왜곡시키는 갖가지 이론들이 들어올 것을 말씀하셨다. “사단이 이 진리를 왜곡시키기 위해 모든 종류의 이론들을 불러들일 것이니 조심하라”(6증언, 129). “진리를 가졌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모든 환상적이며 기만적인 교리들이 제시될 것이다”(2기별, 25).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러한 거짓 교리들과 이설들이 범람하도록 용납하시는가? “이설이 그들 가운데 생기고, 그것이 그들을 키질하여 겨를 곡식으로부터 분리시킬 것이다”(5증언, 707). “진리가 경멸과 멸시를 받는 일이 있다 해도 진리가 제시된 후 조사되고 살펴지고 논쟁되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의 마음에 소요가 일어나야만 한다. 모든 논쟁, 모든 견책,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모든 노력들은 그러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잠자는 영혼을 깨울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들을 일깨우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들이다”(보훈, 33).

주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다가오는 위기에 무감각하며,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시험의 때를 통과할 수 없음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을 받도록 준비시키는 성경의 진리들을 연구하도록 하기 위해 이설의 유입과 진리가 멸시 받는 일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마지막 때의 장면에 대해 경고하시기를 “성화되지 않은 목사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사단의 가증한 횃불에서 불을 붙인 거짓 예언의 횃불을 손에 들고 강단에 서게 될 것이다”(목사, 408). “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안에도 자기가 가르치는 진리로 말미암아 성화되지 않은 목사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떨린다”(3증언, 31). “저희는(재림교인) 우리를 독특한 백성으로 만드는 깃발이나 표징을 유별나게 내세울 필요가 없다고 권고하고 있었으며 저들은 우리 기관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어떤 자들이 그 깃발을 옮겨 안식일의 중대성이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저희 손을 이 세상 교회들에 내뻗는 것을 보았다”(2기별, 385)며 탄식하셨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토대는 견고하게 서 있다”(목사, 408). 재림운동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교회는 이 모든 장애들을 뚫고 전진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있을 수 없다.

정답은 오직 한 가지뿐인데 오류는 수천가지의 모양으로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화된 심령을 지닌 주님의 군대를 모아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듣게 하라. … 그 어떤 영혼도 하늘이 보내신 기별을 갖고 그들에게 온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너무 극성을 부린다. 너무 강력하게 말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흠을 잡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말라. 그들은 강력하게 말할 것이나 그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사단은, 우리를 견책하고 책망하며 우리의 과오를 내버리라고 권고하는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조치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궤를 지게 될 어떤 백성이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이다. 그들은 나팔처럼 그 목소리를 높이 날릴 것이다. 진리는 그들의 수중에서 줄어들거나 그 능력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그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 죄를 보여 줄 것이다”(목사, 409~410).

그러므로 재림교회의 권위는 교회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이설과 오류가 범람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세대마다 특별한 관심으로 이 교회를 인도하여 오셨고, 이 교회의 진리를 통해 세상 역사를 마치실 것이다.

성령을 거역함

1997년, 20여년 이상을 걸어온 장로교에서 재림교회로 발걸음을 옮길 때, 성경공부를 통해 결심한 것이 아니라 수개월간 <예언의 신>을 정독하면서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엘렌 G. 화잇이라는 참 선지자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개혁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지자의 글을 통해 남은 교회의 일원이 된 필자가 막상 남은 교회 안에서는 선지자를 무시하는 모습들을 보며 그를 신뢰해야 한다고 외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재림교회는 선지자와 그의 증언에 대하여 명확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들 중에 하나는 예언하는 것이다. 이 은사는 남은교회임을 확인하는 표징이며,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봉사를 통해 나타났다”(27교리, 204). 그럼에도 지도적 위치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엘렌 G. 화잇의 글이 교리적인 권위를 가질 수 없으며 단지 경건한 여성이 쓴 신앙적 권면이라고 치부한다.

역사적으로 엘렌 G. 화잇과 예언의 신에 대한 비난은 1863년 교회가 조직될 당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1980년 재림교회 목사였던 월터 레이(Walter Rea)가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인 윌리엄 한나(William Hanna)의 <예수의 생애>를 화잇 부인이 표절하여 <시대의 소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고 미국 언론에 발표함으로 비난의 수위를 높였고(Chicago Tribune, Nov. 23, 25, 1980; Los Angeles Times, Oct. 23, 1980, Washington Post; Newsweek), 이어 하얀 거짓말이라는 의미로 “화잇의 거짓말”(The White Lie, Turlock; M&PR Pub., 1982)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었다. 당시 대총회는 이 문제로 8년간에 걸친 연구를 하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의 권위자인 천주교인 라믹(Vincent L. Ramik) 변호사에게 월터 레이가 제기한 표절시비에 대하여 법적해결을 위탁했다. 이 법률적 연구의 결과는 저작권법과 표절에 대한 아무런 하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두 책의 사상과 관점이 전혀 다른 책이라고 결론지으면서 본인은 화잇 부인의 글을 통해 변화된 사람이 되었노라는 고백을 했다.

요즘 “사단의 계시를 받은 거짓 선지자 엘렌 G. 화잇”이라는 내용이 담긴 책이 돌고 있는데, 대부분 월터 레이의 주장의 반복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 주장들로 선지자를 공격한다면 그 위험성을 쉽게 분별할 수 있으나, 문제는 화잇 부인의 영감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지도자들이 선지자를 인정하는듯하면서도 그 글에 권위를 부여하지 않거나 은근히 비하하는 발언들을 하며 예언의 선물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기별들에 대한 신뢰심을 흔들어 놓기 위하여 … 현대 진리를 주장하면서도 계시들을 무시하는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보았는데, … 그대들의 반대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도구로 사용하신 벌레 같은 인간을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1기별, 40, 42).

재림교회 대학인 왈라왈라의 몇 신학과 교수들이 오래 전 공식적으로 “화잇의 글은 신학에 관해서는 어떤 권위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치부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 됐다. 또한 미주 재림교회 홈페이지의 글들을 보노라면 여기가 재림교회 공식 웹 사이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혼미케 하는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다. 하루 이틀 있어왔던 일들은 아니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그들의 표현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뭐 그저 일반 백성들이 자신이 깨달은 바나 경험한 바를 나누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묵인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목회자, 신학교수 등의 지도자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이미 벗어난 느낌을 준다. 재림신학을 자유주의 개신교신학과 동일하게 만들려는 지난 50여 년간 신(新)신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언을 듣고 있다.

“1844년에 다시 지성소로 들어갈 이유가 없다. 하늘 성소교리는 잘못됐으며 그것을 믿는 사람은 17세의 어린 화잇에게 묶여 있는 사람들이다.” “초등교육도 못 받은 화잇에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계시를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까지 화잇에게 머물고 있다.” “화잇 여사의 영감은 성경의 저자들의 영감보다 낮은 것이며, 화잇은 선지자(prophet)가 아닌 사자(messenger)에 불과하다.”
엘렌 G. 화잇의 영감이 성경저자들의 영감보다 낮은 것이라는 이러한 주장은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엘렌 G. 화잇이 “성경으로 향하는 관심이 미약합니다. 주께서는 사람들을 보다 큰 빛(the greater light)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의 더 작은 빛(a lesser light)을 주셨습니다”(리뷰, 1903. 1. 20)는 말씀으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내가 위탁받은 일은 예언자(prophet)의 일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1기별, 36).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 칭호(여선지자)로 부른다 해도 나는 그들과 논쟁하지 않겠습니다”(1기별, 34).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칭호가 시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위한 메시지를 위탁받은 한 메신저로 봅니다”(1기별, 36).

엘렌 G. 화잇은 자신을 일컬어 선지자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기별자(messenger)라고 말한 사실을 들어 엘렌 G. 화잇의 영감은 낮은 차원의 영감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선지자 이상의 것이라고 한 증언은 무시한다. 이러한 그릇된 영향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신을 거절하는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한다. “교리 설교하지 말라. 예수만 전하라.” 그러나 참된 교리를 전하면 참된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성경의 교리들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리를 전하지 않고 예수만 전하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진짜 구세주를 잘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교단은 195개나 된다. 재림교회는 그 중 하나일 뿐인가? 왜 재림교회가 이 마지막 시점에 지구상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예수 만세! 예수는 구세주!”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인가? 그것은 다른 교회에서도 다 하는 일이다. 재림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라야 한다. 다르기 때문에 이단소리 들어도 다른 건 다른 것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그저 또 다른 한 종파가 아니라 예언된 시간에 개혁을 완성하기 위하여 일어난 하나의 운동이다.

필자는 이 설교를 듣고 정말 귀를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게 청중들에게 “조사심판이 현재 진행 중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어떤 이는 “모르겠다” 어떤 이는 “진행 중이다”라고 대답했으나 그분은 “아니다! 무슨 천사가 우리를 따라다니며 죄의 기록을 적고 하나님께서 그런 걸로 심판하시냐? 내가 이것 때문에 상당히 두려운 신앙생활을 보냈다”는 등 선지자의 글에 부정적 이해를 피력하신 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하면서 조사심판은 없는 것이며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셨다. 많은 시간과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들이니 충분히 존중하고 그것이 선지자께서 말한 ‘새로운 빛’이라면 “아멘”하고 받아들여야겠지만 그래도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던 차에, 교회지남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조사심판을 배척하는 이유와 그 문제점” 참으로 시기적절한 기사였다. 그런데 이 기사가 일반 개신교회를 대상으로 한 내용이 아니라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재림교회 내에서 “조사심판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논쟁은 교회를 배도하고 떠났던 몇 신학자들의 얘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교단의 녹을 먹으면서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조사심판을 부인하는 것은 그것에 관해 너무도 분명히 말한 선지자를 부인하는 것이요 결국 모든 증언의 말씀을 불신하는 길을 열고 있다.

미국에서는 조사심판과 하늘성소를 부인하는 것이 재림교회 신학자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져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지난 2기 교과를 집필하고 현 애드벤티스트 리뷰(Adventist Review) 부편집장으로 있는 로이 애덤스이다. 2006년 사경회 부교재가 로이 애덤스의 <하늘성소(한국연합회목회부)>였고 또 지난 교과에서(2008년 2기) 그의 <하늘성소>책을 인용하며 마치 재림교회의 성소진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저술했는데 그가 이해하는 하늘성소의 개념은 재림신앙의 성소진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하늘성소를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기능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만, 로이 애덤스의 “성소론”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 “성소교리에 대한 재림교회안의 세 가지 이해들”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구속사업이 완전히 마쳤다는 일반 개신교적 구원론을 제시하고 있다.

재림교회의 성소진리는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는데, 화잇부인이 생존하던 당시 밸린저부터 시작하여 D.M. 캔라이트, W.W. 플레처, 1956년 QOD를 통해 우리의 속죄교리가 타협되었고, 1970년대 데스몬드 포드에 의해 다시 공격받았으며 오늘날 로이 애덤스와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마치 재림신학의 발전된 이해인양 포장되어 또다시 공격받고 있는 것이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히브리서 6:19절의 ‘휘장 안’을 성소의 첫째 칸으로 이해했고(초기, 44), 성소진리를 공격해 온 사람들은 둘째 칸, 즉 지성소로 주장했다. 애덤스는 그의 책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신 즉시 지성소에 들어가셨으며, 또 하늘 지성소가 십자가의 희생으로 정결함을 입었다는 밸린저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엘렌 G. 화잇이 밸린저의 신학 전반을 정죄했지만, 그(벨린저)가 이 부분에서는 옳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가 옳았다면 ‘휘장 안에’라는 표현이 하늘 성소의 성소를 가리킨다는 우리의 선구자들의 견해가 옳지 않았다고 여겨야 한다”(애덤스, 하늘성소, 134)고 주장한다.

애덤스는 엘렌 G. 화잇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선구자들의 견해를 해석학적으로는 틀렸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거나, 두 견해 모두 용납될 수 있지만 밸린저의 견해가 옳다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말들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엘렌 G. 화잇이 밸린저의 신학을 정죄했지만, 히 6:19절의 ‘휘장 안’을 지성소로 설명한 밸린저의 주장을 명시하여 정죄한 것은 아니므로 자신이 밸린저의 입장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런 애덤스의 진술은 정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늘성소에 대한 밸린저의 핵심이 바로 이 ‘휘장 안’에 대한 해석이며, 애덤스가 선구자들의 견해가 틀렸다고 말함으로써 재림교회 성소신학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가져와야 하고, 바로 이것이 교회를 떠난 이들의 공통된 주장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그것이 첫째 칸이냐 둘째 칸(지성소)이냐가 아니라 예수께서 언제 지성소 봉사(조사심판)를 시작하셨는가이다. 승천하신 즉시 둘째 휘장 안으로 들어가셔서 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셨다는 주장은 1844년에 시작된 대속죄일부터 성소가 정결케 된다는 재림교회의 신앙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며, 회개하는 즉시 죄가 도말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대속죄일이 상징하는 재림 전 조사심판을 거친 죄의 도말이 필요 없게 된다.

“2300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단 8:14). 다니엘서의 예언은 어느 특별한 시기(때)를 지목하고 있는데 그것은 계시록 14:7절의 “심판하실 시간” 즉 1844년을 말한다. 2300주야 예언의 종결점인 1844년 10월 22일은 성소정결과 연결된 조사심판을 시작하신 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소정결은 언제 이루어졌는가? 연중 마지막 봉사인 대속죄일에 죄가 도말 될 때이다. 성소제도는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의 경륜이다.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바쳐지는 번제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도말로 구속사업이 완성된다. 성소정결은 하늘에 있는 책들에서 죄를 도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생애에서도 죄를 실제적으로 도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늘 성소가 정결해진다는 것은 이 땅에 있는 영혼의 성전이 깨끗해졌다는 것이다.

죄를 도말 받는 자들이 인침을 받는다. ‘죄의 도말’은 지난 6,000여 년간 인류구원 역사의 최대의 클라이맥스이고 최고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래서 조사심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결론이며 그것이 바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별이다. 바로 이 점이 재림교회를 다른 모든 교회들과 구별하는 것이며, 재림교회는 바로 이 성소교리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결국 로이 애덤스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예언의 신 전반을 통해 명백히 제시되고 있는 재림교회의 구원관이다.

밸린저가 “구속사업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주장하자 화잇부인은 “이러한 교리가 수용되면 성소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흔들림을 가져올 것”(엘렌화잇 일기, Ms 145, 1905)이라고 명확하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애덤스는 대담하게 “밸린저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일화를 들고 있다.

“1905년 밸린저의 여러 신학적 주장들 특히 속죄가 십자가에서 끝났다는 입장으로 인해 그 당시 교회지도자들로부터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 당시 젊은 목사인 M. L 앤드리어슨은 동료목회자들과 엿들었던 경험을 전한 적이 있다. 이 상황이 그로부터 50년 후 바로 이 앤드리어슨이 교단 지도자들과 심각한 싸움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때는 교회지도자들이 십자가에서 완결된 속죄(atonement)라는 (밸린저의)입장을 지지하였으며 앤드리어슨은 1905년 교회 지도자들이 가졌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재림교회신학이 정체되지 않고 발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애덤스, 영문성소론 12).

로이 애덤스의 성소론을 재림교회 성소신학의 발전으로 받아들이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주신 기별을 거절해야만 한다. 밸린저나 애덤스가 제시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재림신앙의 선구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가 이방 종교의 신들처럼 “지성소”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고 이해하지 않고 “움직이는 보좌(moving THRONE)”의 개념을 확실히 견지하고 있었다(초기, 55; 단 7:13). 땅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지성소에만 국한되었던 이유는 인간들의 죄 때문이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을 수밖에 없었고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가면 소멸되기 때문에 그러했다. 하지만 하늘성소에는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지성소에만 국한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하늘성소>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부분이 가장 깊이 있게 다루어진 책인데, <재림교회성경주석>을 편찬할 때 다행스럽게도 역사주의 재림신학의 입장에 서 있는 M. L 앤드리어슨 목사가 히브리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로이 애덤스와 같은 설명을 “그리스도가 승천하자마자 즉시 지성소에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가르치는 어떤 비(非)재림교 학자들”의 주장이라고 설명하면서, ‘휘장 안’에 대하여 재림신앙과 조화된 몇 가지 견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① 바울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을 “둘째 휘장”(히 9:3)이라고 했기 때문에 단순히 “휘장”(히 6:19)이라고 말했을 때는 성막 문에 있는 휘장을 가리킨 것이며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갔을 때는 성소의 첫째 칸으로 들어갔다(쟁투, 420).

② 그리스도의 사역의 변화, 즉 예수께서 대제사장직에 취임할 때 지성소로 들어갔음을 언급하면서(단 9:24; 출 30:26~29; 40장; 쟁투, 489), ‘휘장 안’이 첫째 칸 또는 둘째 칸도 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참조 한글판 SDA주석 13권 536~538).

앤드리어슨의 이러한 이해는 선지자의 증언과 일맥 하는데 화잇 부인은 히 6:19절의 ‘휘장 안’을 첫째와 둘째 휘장 모두에 적용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관점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사역의 내용이다. 승천 후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성소 봉사(성소정결)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히 6:19절의 ‘휘장 안’은 1844년 이전까지는 성소 첫째 칸의 봉사였고, 1844년 이후로는 지성소봉사(재림 전 조사심판)라고 보는 것이 재림신앙과 가장 어울리는 이해이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김명호 저, 삼육대학교출판부, 211)>에서는 앤드리어슨의 히브리서 주석을 자세히 인용하면서 “이 주석의 내용이 우리교회 공식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덤스 목사의 논문은 심사위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통과되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아마도 대부분이 앤드루스 대학 교수들이었을 것이다.” “화잇 여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별이 아니라고 지적한 밸린저의 해석을 애덤스가 채택하고 있는 것이 문제”(상동, 206)라고 한 후 “히브리서 6:19절의 휘장 안으로 들어가신 것이 승천하시자마자 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예언된 때에 대한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상동, 222)라고 진단한다.

위의 내용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신신학자들의 예언의 신에 대한 공개적인 부정은 주로 음식물에 대한 제한, 화려한 화장과 귀금속의 착용을 금하는 것 등을 율법주의라고 정죄하고 그와 같은 행습에 더 이상 구속당하지 않고 해방되었다는 사상을 가짐으로서 그들의 주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엘렌 G. 화잇이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에 관해서는 틀릴 수도 있고, 그의 기별은 교리적인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예언의 신은 경이로운 글이요, 화잇을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거짓 칭찬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감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적인 접근에도 그들의 참 모습을 감추는 데에는 시간의 한계가 있었고, 결국 그들이 엘렌 G. 화잇의 예언적 은사를 부인하는 현실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사단의 계획은 증언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다음에는 우리 입장의 기둥들인 우리 신앙의 핵심 사항들에 대하여 회의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성경에 대하여 의심하게 하며, 그 후에는 파멸로 달려 내려가게 한다”(4증언, 211).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단의 깃발 아래 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먼저 하나님의 영의 증언에 포함된 경고와 책망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3기별, 84).

재림교회는 <말씀(교리)>을 연구하다가 탄생한 말씀의 백성이다. 재림교회의 교리들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교회지도자로 있을 수 있는지 정말 의문이다. 이 마지막 때 재림교회는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기별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소위 “예수만” 말하는 일반 개신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은근히 재림교회의 교리를 비하하고, 재림교회의 독특성을 무시하고, 일반개신교회와 똑같아지려는 이상한 욕망의 출처가 어디인가!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위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인정받는 사상가로 추앙받고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편협하고 완고한 율법주의자들이요 교회를 허무는 사람들로 치부되는 오늘날의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오죽하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의사들과 목사들 가운데 증언들을 저버리는 경향이 심해졌으므로 저들의 손에 증언들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겠는가(1기별, 51).

“그들은 일어나서 이 증언을 반대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흔들림을 야기할 것이다”(사건, 175). “사단의 최후의 기만술은 성령의 증언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이 참된 증언을 믿는 신뢰심을 불안정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과 다양한 매개물들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활동할 것입니다”(2기별, 78).

성경과 구원의 관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우리의 구원은 성경 안에 있는 진리를 아는 데 달려 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찾으라! 갈급하는 심령으로 보배로운 성경을 살펴보라”(실물, 111).

기독교에 성경이 없었다면,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을 그리스도라고 믿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으며 당신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과 사귀도록 우리를 은혜스럽게 초청하신다. 하나님은 사단의 기만적 능력을 대항하는 방어책으로 성경을 주셨다. 그러나 사단은 온갖 계책을 다 써서 사람들이 성경 지식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래서 성경을 알지 못하면 사단의 속임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진리로 마음을 견고히 방어한 자들 외에는 아무도 최후의 대쟁투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 사람들은 성경의 교훈을 교회에서 설명한 대로만 받아들이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아무리 분명히 계시된 것일지라도 그들의 신조나 그들의 교회가 확립해 놓은 교훈에 반대되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성경에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가 충분히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을 지켜 주도록 성직자에게 맡기고자 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구주의 가르침은 거의 유의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면서 목사들의 말은 맹목적으로 믿는다. … 많은 사람은 세속의 길을 끊어 버릴 도덕적 용기가 부족하므로 학자들의 발자취를 따르게 되고 그들 스스로 연구하기를 싫어하므로 속절없이 오류의 쇠사슬에 매여 있게 된다. 그들은 이 시대를 위한 진리가 성경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진리를 증거할 때 성령의 능력이 수반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빛에서 그들을 돌아서게 하는 지도자의 반대에 맹종한다. 비록 이성과 양심이 각성되어 있을지라도 그 기만당한 사람들은 감히 목사들과 다르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개인적 판단과 영원한 유익은 다른 사람의 불신과 교만과 편견으로 말미암아 희생당하게 된다”(쟁투, 595~596).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성경을 주지 않으셨다.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그 연구에 사용되는 지성의 능력에 의존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전심전력하는 태도, 곧 의를 열렬히 사모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쟁투, 600).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예언의 신과 구원의 관계

“거룩한 성령이 성경과 예언의 신의 저자이다”(3기별, 30). 인류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꼭 필요한 선물을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대언의 영”(계 19:10)이다.

우라이아 스미스 목사는 리뷰 앤 헤럴드 1863년 1월 13일자에서 흥미 있는 예화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항해를 시작하려고 하는 입장에 있다고 가정하자. 선박의 소유주가 우리에게 항해 지침서를 주면서 항해를 위한 충분한 설명이 그 책에 있으므로 그것에 유의 한다면 우리는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윽고 배가 출항하자, 그 책을 펴서 내용을 보게 된다. 그 책은 항해시 준수해야 할 규칙들을 소개하고 최종까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가지 우발사고들을 망라한 실제적인 모든 것들이 설명되어 있었다. 또 해안의 상태가 폭풍우에 의해서 항상 변하기 때문에 여행의 말기가 특별히 위험할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안내자를 만나게 될 것인데, 그가 주변의 변화와 위험들에 대해 필요한 설명을 하고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줄 것이므로 그를 청종하라고 하였다. 명시된 위험한 곳에 도착하자 이 지침서에 약속된 대로 안내자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조그만 배였다. 그가 도와주려 할 때 어떤 승무원들은 그를 반대하여 일어난다.

“이처럼 거대한 배가 저렇게 작은 배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항해 지침서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것에만 의존할 뿐이지 당신은 필요하지 않소.” 그 조그만 배는 육지가 가까워 옴에 따라 수심이 낮아지므로 각종 암초의 위험으로부터 길을 안내해 줄 예인선이었다. 자 그렇다면 누가 항해 지침서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안내자를 거절한 부류인가? 아니면 지침서의 지시대로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인가?”

대언의 선물은 위험한 우리 시대의 안내자로 주어졌다. 누가 과연 오직 성경만 따르고 있는 사람들인가? 그것은 바로 지침서에 따라 안내자를 받아들인 자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받아들이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되며, 사단의 기만적인 암초에 부딪쳐 파선하게 될 것이다.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1)이다.

“증언들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은 사단에게 속한 정신이다. 증언들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동요시키는 것이 사단의 책략이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이렇다. 만일 하나님의 영께서 주시는 경고와 견책과 권고들을 귀담아 듣는다면 사단은 자기의 기만술을 펼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없으며 자기의 기만 속에 영혼들을 묶어둘 수 없기 때문이다”(1기별, 48).

예언의 신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를 인도하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재림교인마다 각종 오류의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언의 신을 많이 읽어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예수의 증거

역사의 중대 고비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셨다.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았던 그때, 한 사람 노아를 보내셔서 그 일을 준비시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져 우상숭배로 가득한 위기의 때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온 세상이 기근으로 죽게 될 것을 보시고 요셉을 부르셨으며, 이집트 노예상태에서 모세를 예비하셨고, 엘리야를 부르셔서 하나님이 참 신임을 보여주셨고, 올곧은 다니엘을 불러 인류역사를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임을 선포하시고, 학개와 스가랴를 부르셔서 부흥과 개혁을 일으키셨다. 예언의 시간표대로 메시아가 왔을 때 침례요한을 부르셔서 왕의 대로를 평탄케 하셨고 바울을 택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속사의 과정이다. 그런데 마지막 구속사의 종결을 앞두고 선지자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속사의 관점에도 맞지 않다. 부인할 수 없는 2300주야 예언의 끝이 이르렀을 때 이 긴박한 마지막 최대의 위기, 사단의 최후의 공격에 대비해 한 선지자를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케 하셨는데 그가 바로 엘렌 G. 화잇이다. 사단은 모든 기독교회를 잠자게 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식별할 수 있는 예언적인 눈을 남은 교회에 주셨다. 재림교회는 세상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갖게 된 것이다.

재림교회가 타 기독교회와 다른 교리가 무엇인가? 재림교회 기본교리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52%가 개신교회의 교리와 같다. 절반이상이 같으며 심지어 어떤 보수교단과는 39%를 공유하는 교리도 있다. 침례, 조건적 불멸, 안식일 준수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91%가 다른 교파와 공유하고 있는 교리라는 말이 된다. 나머지 9% 재림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 때문에 재림교회가 이 세상에 출현해야 할 이유이며, 그것 때문에 일반 개신교로부터 이단소리를 듣고, 그것이 싫어서 우리의 지계표를 무너뜨리려는 재림교회 신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늘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사업인 재림 전 심판(히브리서), 세 천사 기별(계 14장), 그리고 예언의 신(계 12, 19장)이다. 재림교회가 다른 교회와의 차이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이 세 가지이며 모두 성경적인 근거가 확실하다.

17세 때인 1844년부터 1915년 운명할 때까지 2,000번 이상의 계시를 보았고, 저술한 기사가 5,000개 이상이나 된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이후 엄청난 분량의 글을 남기고 수많은 강의를 했지만, 엘렌 G. 화잇의 20% 정도 밖에 안 된다. 선지자의 원고를 페이지수로 하면 10만 페이지가 되며, 출판된 책은 100권이 넘는다. 영적인 능력이 부여되지 않았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로의 계단은 143개 언어로 출판되었다. 인류역사의 모든 책을 살펴봐도 한 작가의 책이 1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것은 이 책 말고는 없다.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구주를 발견한다.

그런데 재림교인들은 어떠한가? 1990년 라시에라 대학에서 엘렌 G. 화잇의 책을 규칙적으로 읽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14%였는데, 10년 후 2000년에 조사할 때는 7% 미만이었다. 지금은 어떠할까….

유대인들 역시 그들의 선지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시궁창에 빠트리고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였다. 왜 그랬는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렘 23장에 참 선지자의 역할이 나오는데, 그것은 잘못한 것에 대해 곧바른 증언을 하는 것이다. 그 일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라도 그렇게 했다.

엘렌 G. 화잇과 예언의 신을 부인하는 얘기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우리는 심각한 위기의 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화잇부인은 선지자다. 아니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예언의 신 전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부분은 믿고 순종할 만하며, 어떤 부분은 단순한 권면인가? 성경에서 어떤 부분은 순종할 것이며, 어떤 부분은 “좋은 얘기다” 할 데가 있는가? 성경 말씀대로 하든지 아니면 버리든지! 엘렌 G. 화잇이 사기꾼이던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든지 둘 중 하나다.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교사일 뿐인가?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던지 사기꾼이던지 둘 중 하나다.

많은 학자들이 우리의 신조는 “오직성경”임을 강조하면서, “선지자의 글이 성경과 어긋날 때 우리는 성경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논리 전개에는 “예언의 신”이 성경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신을 심어준다. 그 저변에 깔려있는 그들의 얄팍한 속임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결국 선지자와 증언을 불신하게 될 것이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성경이 그 자체의 해석자이며 성경만이 모든 교리의 기초라는 이 원칙에 필자도 동의하며 엘렌 G. 화잇도 성경이 교회의 최종적 규범이라고 가르쳤다(참조 초기, 78; 5증언, 664). 엘렌 G. 화잇의 저술들은 성경의 대체물이 아니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성경연구를 통해 기본 신조들을 발전시켰다. 1849년 메사추세츠에서 매우 중요한 컨퍼런스가 있었는데, 선지자는 이 기간 내내 아무런 이상과 계시를 보지 못하여 몹시 답답한 기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지한 성경연구가 있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중요주제는 “언제 안식일이 시작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금요일 밤 12시부터 토요일 밤 12시까지인가,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밤 12시까지인가? 그들이 안식일을 “해질 때부터 해질 때”라고 결정했을 때, 그때 비로소 엘렌 G. 화잇은 그들의 결정이 옳았다는 이상을 보게 되었다. 선지자의 주요 역할은 교리확정에 권위를 부여하며, 곁길로 나간다면 바른 궤도로 이끌어주며, 성경이 망원경이면 예언의 신은 현미경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충만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재림교회가 세 천사 기별을 땅 끝까지 전파할 사명을 지닌 이 땅의 유일한 교회임에 틀림이 없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지닌 교회이며 “엘렌 G. 화잇과 예언의 신”은 그 두 가지 특성 중 하나에 해당되는 “하늘에서 허락된 예언의 선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예언의 선물인 예수의 증거는 남은 교회의 독특한 특징이다. 엘렌 G. 화잇을 부인하는 것은 재림교회가 마지막 시대 남은 교회라는 사실을 거절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 특별히 부름 받은 교회에 특별한 예언의 선물을 주셨다. 이것이 재림교회의 정체성이다. 재림교회의 정체성을 스스로 감추거나 타 교파에 인정받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의식하면서 사장시켜버리려는 끈질긴 노력을 기뻐할 자는 사단밖에 없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은 사단의 분노를 당하게 될 것이다(계 12:17). 이때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란”의 시기이다(단 12:1). 그러나 각 시대의 대 쟁투 중 가장 극심한 이 환란에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증거인 대언의 영”(계 19:10)을 주셔서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고 계신다.

엘렌 G. 화잇과 재림교회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선 너희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하나님의 계명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속죄일 기간에 그들의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 지성소에 임재하셔서 심판하시는 일을 하셨던 것처럼, 1844년에 시작된 역사적 대속죄일은 예수께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시면서부터 진행되었다. 오늘날 주께서 조사심판하시는 동안 이 땅의 백성들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계 14:12)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영원한 복음, 남은무리의 사명 아닌가!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율법이 저들의 마음에 기록되고 저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이동하신 주님을 따라 들어가 대속죄일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같은 엄숙한 역사적 시기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재림교회의 중요한 기별인 것이다(단 7:9,10).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반대하고 죽이려는 세력을 만나게 될 것이다. “믿으면 된다. 너무 그렇게 애쓰지 말라”고 외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의 품성은 눈엣가시가 된다. 그래서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말과 글로 위협과 조롱으로 그리고 이제 칼과 죽음으로 분노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놀랄 필요 없다. 용은 안식일만 지키고 있는 자들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며 윽박지르고 있을 때, 남이 칭찬받는 것을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싶은 욕망이 있을 때, 쇼핑 또는 텔레비전이나 신문, 인터넷 보는 것을 즐겨하고 대화의 주제가 그러한 것들로 채워질 때, 자녀를 출세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세속적 이익을 얻기 위해 한마디의 말이나 머리를 한번 끄덕임으로 정직을 버릴 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 정도 거짓말은 괜찮다고 생각할 때, 더 좋은 차와 집을 소유하기 위해 일하고 있을 때, 남의 실수를 자꾸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을 때, 말씀의 원칙들을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고 있을 때,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남이 칭찬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서운할 때 걱정하지 말라. 용은 그런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중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용의 편에 있는 것이다. 용은 오직 한 무리,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남은무리에게만 분노한다(계 14:5).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계명들을 설교하든지 간에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정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범하는 자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가 용과 함께 핍박을 가할 자인지, 용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자인지 결정한다. 중간은 없다. 우리는 막연히 먼 장래에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애써 기대하지만, 양심은 무엇인가 잘못돼 가고 있다며 소리치고 있지 않은가?

미칠 듯이 광포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

사단은 율법을 아주 가볍게 취급하여 죄를 그리 반대할만한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의 생명이 위험 앞에 놓일 때 죽기보다는 차라리 그 율법을 불순종하는 것을 택하게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요일 휴업령”은 필자가 장로교에서 개혁할 때부터 들어왔던 소리다. 벌써 10여년을 들어왔으니 식상해 질만도 됐거늘 하물며 평생을 들어왔던 재림교인들은 오죽하겠는가! 어떤 이들은 “일요일휴업령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소리야. 그게 내리면 천사들이 날 인도해 주겠지. 아, 나는 사단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나타날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어. 물론 안식일 진리도 잘 알고 있지. 내가 어떻게 안식일을 포기하고 짐승의 표를 받겠어? 온 세상이 일요일을 지킬 때 나도 일요일을 지키게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겁니다!” 호언장담했던 베드로! 위기의 때에, 목숨이 눈앞에서 흔들거릴 때, 베드로는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지 자신을 몰랐다.

사랑하는 재림성도여! 베드로에게는 울며 통회하고 다시 전진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닥칠 위기의 때에는 두 번째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을 위해 살고 싶은 소원이 가득 차 있지 않다면 더 늦기 전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나가야 한다.

“무시무시하게 미칠 듯이 광포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8증언, 315). “모든 영혼들에게 시험이 닥쳐 올 시간은 멀지 않았다. 우리들은 거짓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 한걸음 한걸음씩 세상의 요구에 양보하고 습관에 순응해 온 자들은 조소와 모욕과 위협적인 투옥과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에 굴복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선지, 188).

사랑하는 재림성도여 당신은 이 위기에 준비되었는가? “사망이 갑자기 그대들을 빼앗아감으로써 그대들에게 마지막 변화를 위하여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2보감,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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